10월 19, 2017

남아 있는 나날

세상 모든 것을 돌이킨다 해도 딱 한 가지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없다면 후회도 없을 것이다. 후회는 과거를 향한 마음이며, 과거는 바로 시간이 만들어 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린 늘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라고 하면서 후회를 시작한다. 비로소 실존적 자아로 남게 되는 인생 황혼기에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 보면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지난 삶에 대한 후회가 밀물처럼 닥칠 것이다. 어떤 인생을 살았든 태산 같은 후회가 반드시 밀려올 것이다. 전문가적 자아는 사라지고 실존적 자아만 남았기 때문이다. 인생 전체를 통째로 바친 전문가적 자아는 때가 되면 반드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시간을 되돌려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든 굴러가고, 시간은 무시로 흘러가며 곧 인생은 저절로 지나간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무엇을 하든 시곗바늘은 끊임없이 우회전한다. 마침내 누구나 마지막 저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겐 다양한 면이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품위가 가득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정반대일 수 있다. 품위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본인 직업에서 상당한 품위를 인정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 모든 것이 품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연인, 직업인, 아빠, 남편 등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인격이 존재한다. 한 사람당 인격이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여러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가족을 대할 때, 친구를 대할 때, 거래처 사람을 대할 때 각각 다른 사람이 된다.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고 그에 따른 개별 품위가 있다. 어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품위를 훼손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일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이며 동시에 품위 없는 사람이다.  

자연인으로서 실존적 품위를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그 사람이 하는 일, 사회적 위치 등 전문가적 실존으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조용필은 가수로서, 노무현은 정치인으로서, 미스코리아는 미모로서 그 실존을 평가받는다. 하여 전문가적 실존이 사라지는 인생 황혼기나 내리막길에 접어 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연인으로서 실존을 찾지 못해 우울하게 된다. 실존적 자아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어렵고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가치를 인정받고 자기 분야에서 품위 있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 인생 황혼기에서 돌이켜 볼 때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었던 신념, 확신에 찼던 가치 판단은 여전히 유효한가?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후회를 하게 된다. 결국 실존적 자아만 남는데 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알맹이인 동시에 껍데기일 뿐이다. 실존적 자아가 본질임에도 평생 껍데기로 치부하다가 전문가적 자아를 상실한 후에 다시 알맹이로 대접하려고 하니 어찌 진정한 본질이 되겠는가 말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실존적 존재로 돌아갈 터이다. 사적 실존을 버리고 전문가적 실존을 지키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실존적 자아가 더 중요한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실존적 자아를 지키는 것은 어쩌면 배부른 소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실존적 자아와 전문가적 자아 사이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을수록 점점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좋은 책이다.  


9월 15, 2017

죽음의 수용소에서

우리 삶 속에는 ‘시련’이라는 바이러스가 있다. 한 고비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겨우 오르막을 오르고 한숨 돌리나 싶은데 또 오르막이 보인다. 고민, 방황, 과로, 질병, 술, 담배 등 바이러스를 키우는 원인이 끝없이 계속된다. 공기처럼, 바람처럼 시련은 우리와 함께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 받고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삶은 시련 바이러스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시련 바이러스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방주사 역할도 한다. 이른바 우리 몸은 면역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을 당해 보면, 해 보면 다음번에는 처음보다 덜 아프게 되고 더 잘하게 된다. 그래서 예방주사를 맞거나 훈련을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 니체

가난, 질병, 고독, 전쟁, 기아 등 인간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는 많은 고통이 있다. 고통도 형편에 따라 다르고 태어난 국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고통은 무엇일까?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고통 받는 자들이 모여서 고통 올림픽을 한다면 누가 종합 우승을 할까? 
고통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우승할까? 아니면 고통을 많이 줘 본 사람이 우승할까? 
고통 올림픽은 어느 도시에서 개최를 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인도? 네팔? 타히티? 
고통 올림픽에서 심판은 누가 봐야 하고 어떤 자격을 가져야 할까? 

고통 올림픽 정식 종목을 채택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선 세상 모든 고통을 모으고 체계화해야 한다. 이 모든 고통을 계량화해야 한다. 누구 고통이 더 고통스러운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장비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게 내가 겪는 고통이 제일 고통스럽다. 

고통 올림픽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고통 훈련을 해야 한다. 모든 고통을 견디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 고통은 그저 훈련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고통 올림픽 선수는 고통을 안 받으면 불행한 것이 된다. 고통을 받을수록 우승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시련과 고통은 사람을 자라게 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고통 올림픽 선수 자격을 갖는다. 주 종목은 다르겠지만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고통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다. 시련 없이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죽은 자에게 고통이 있을 리 없다. 결국 고통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인생이란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지 시련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시련 없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실제 3년 동안 갇혀 지냈던 저자는 정신과 의사다. 아우슈비츠는 나치 독일의 수용소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악명 높았던 수용소 중 수용소, 수용소의 갑이다. 저자는 거기서 무려 3년을 버틴 사람이다. 저자 말을 안 들을 수 없다.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 두 문장만 봐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극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같은 환경에서 누구는 살아 남았고 누구는 죽었을까? 인간이 이토록 절박한 상황을 맞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언제 수용소에서 풀려날지 알 수 없는 비참한 시간 속에서 과연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살게 했을까?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삶이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이지 시련을 부정하는 과정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만들고 살아야 하는 목표를 만드는 것이 시련을 극복하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스피노자  <윤리학>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또 아는가?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지. 과거를 꿈꾸는 경우는 없다. 모두 미래를 꿈꾼다. 과거는 추억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고 미래는 기대, 설렘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다. 미래가 담긴 선물상자를 뜯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자격이 필요한데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미래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미래가 온다.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선물이 갈 것이다. 
힘들지만 출근하는 이유는 퇴근이라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춥고 매서운 겨울을 견디는 건 따뜻한 봄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은 늘 희망이라는 선물을 행복이라는 바구니에 담아서 왔다. 바구니 크기는 다를지 몰라도 어김없이 시간은 찾아 온다. 과거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미래다. 미래는 꿈이다. 우리는 오직 미래를 향한 꿈만 꿀 수 있다. 하여 우리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다. 뭐 대단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삶은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절박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단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다. 정신력 차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철학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더군다나 갇힌 공간에서, 언제 죽을지 하루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지킬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까? 무슨 수로, 나약한 인간이 저런 고통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저자는 살아 남았다. 그리고 다른 많은 동료들을 살려냈다. 수용소 안은 모든 것이 부족했을 터, 마음으로 사람을 살린 것이고 스스로 산 것이리라. 그 믿음은 무엇에서 비롯됐을까? 본인이 정신과 의사라서 일반인보다 정신적으로 강했던 것인가? 아니면 운이 좋았을 따름인가?

인간의 정신 상태와 육체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가끔 아플 때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집에 들어가면 한결 몸이 편해진다. 아마도 집에 가야 한다는 목표가 무의식 중에 있었고, 그 목표를 달성한 순간 심리적 안정감이 육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밖에서는 피곤하고 힘들었던 몸이 집에 들어가는 순간 신기하게도 평정을 찾는 상태. 몸이 느끼고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도 피곤한 줄 모른다. 

의미와 목표는 미래를 위한 설계가 된다. 누구도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따라서 미래가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미래를 밝히고 명확히 준비하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아라. 그것이 바로 미래의 자신이다. 적당한 긴장감은 고통을 이겨내도록 도울 것이다. 미래에 수행해야할 과제를 설정하라. 목표는 곧 삶이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살아 있을 때는 살 걱정만 하면 된다. 죽을 걱정은 죽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두려움은 간절한 소망과 같다.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대로 일이 일어나고 만다. 

paradoxical intention : 마음속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

불면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결국 어떻게든 잠을 자야겠다는 과도한 의욕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그 반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환자에게 잠을 자려고 애쓰지 말고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보라고 권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결국 삶은 스스로 행하는 모든 것이다. 삶은 능동적인 내 선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총칼도 필요하고, 철학도 필요하며 술과 담배도 필요하고 약도 필요하다. 비단결 같은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9월 08, 2017

호모 데우스

현대 사회는 대체로 호화롭고 부족함 없는 곳이다. 우리가 이런 풍족한 삶을 누리는 이유는 운 좋게 사피엔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자나 돼지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행운이 머지 않아 사라질 수도 있다. 사자, 코끼리, 원숭이, 닭, 돼지 등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사피엔스는 무엇이 다른가?

사자는 먹을 것만 좇는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먹는 것, 자는 것, 생식 활동 외에 다른 문화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볼 땐 그렇다. 지능과 인식, 상호 주관적 실재에 대한 합의, 이런 것들이 오늘날 사피엔스를 있게 만들었다. 사자가 임팔라를 죽였다는 이유로 법정에 설 일은 없다. 독버섯이 독을 가지고 있다고 식약처에 신고할 이유도 없다. 

사피엔스는 수많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 외에 사피엔스가 창조하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법, 가치, 화폐, 도덕, 종교도 모두 사피엔스가 창조한 것이다. 이 창조물은 사회적 약속이며 구성원 상당수가 인정하고 인지해야만 가치를 가지게 된다. 또는 국가, 경제, 문화, 역사, 권력의 힘으로 강제하면 한다. 아무도 화폐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무용지물이 됐을 것이다. 
사자에게 임팔라 한 마리 가질래? 백만 원 가질래? 물어 보면 답은 뻔하다. 원숭이에게 바나나 열 개 가질래? 오천 원 가질래? 물어 보면 답은 뻔하다. 만약 화폐를 선택하는 짐승을 봤다면 당신은 즉시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다. 
다른 동물들이 국가, 경제, 역사, TV, 아이폰, 전파, 화장품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고, 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 등 사피엔스가 오랜 기간 거쳐 이룬 놀라운 역사의 방관자였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방관자라는 것 자체마저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인류는, 사피엔스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전 지구적, 전 우주적 네트워크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다. 우리는 종일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안에서 논다.  네트워크를 통해 친구를 만난다. 잠시라도 네트워크를 떠나면 답답하고 불안하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안 가지고 다니던 백팩을 매일 등에 지고 다닌다. 가방 안에는 맥북이 들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지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해서다. 손에는 늘 아이폰이 잡혀 있고, 아이패드와 애플워치도 살까말까 계속 고민 중이다. 하지만 현재 네트워크와는 차원이 다른 네트워크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모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사피엔스에게는 마음과 의식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마음과 의식이 없으면 그게 인간이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마음과 의식은 머지 않아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거대한 알고리즘, 빅데이터, 네트워크가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통제할 것이다. 움직이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저 서 있는 건물 같은 것, 공포와 쾌감 같은 의식적인 것도 알고리즘이 통제할 것이다. 사피엔스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컴퓨터는 다르다. 또한 순식간에 그 기억을 찾아낸다. 현재 사피엔스 뇌는 절대로 빅데이터와 네트워크로 무장한, 알고리즘의 명령을 받는 컴퓨터를 이길 수 없다. 

인간은 '자연 선택'으로 진화한 아주 정교한 유기적 알고리즘이다. 현존하는 가장 정교한 컴퓨터라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몸, 우리 의식, 우리 영혼이 고도로 정교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과학 기술이 이런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이런 것을 하나씩 증명해 내고 있다. 현대 생명과학은 우리가 자유 의지대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프로그래밍 된 것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오늘 점심에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럼 이것은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즉, 뭘 먹을 것인가 결정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 배가 고픈 것은 우리 자유 의지인가 아닌가? 만약 배고픈 것이 자유 의지라면, 배고플 때 ‘배고프지 마’ 라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는 인간이 최고 가치라고 가르친다. 누구도 인간이 최고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그런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인간만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기 때문이며 인간만이 철학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있고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빅데이터를 가진 그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인류의 가치는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굳이 마음이 필요하지 않고 의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는 데 마음이 필요한가? 모든 차량이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면 굳이 의식을 가진 운전자가 필요한가? 오히려 네트워크로 연결된 차량은 절대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네트워크는 마음이 없고 의식이 없기 때문에 다른 차량을 방해하지 않고 정해진 대로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차량이 끼어든다고 해서 상향등을 켜고 빵빵거리며 위협 운전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이동수단 중에 가장 사고가 적은 것은 비행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뜨고 내리는 전 세계 모든 비행기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모든 비행기 항로가 파악되고 통제되기 때문에 사고가 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 든다. 의식이 없다는 것은 사고(事故)가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피엔스가 의식적으로 어떤 이성을 사랑한다고 치자. 며칠 지나지 않아 분명 사고가 난다. 상대방은 나로 인해 행복하기도 하겠지만 상처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고가 잦으면 결국 헤어지고 만다. 이런 일은 의식 때문에,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욕심과 가치 판단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만약 컴퓨터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면 컴퓨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여자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화를 내도, 아무리 쇼핑을 오래 해도, 화장하느라 매일 약속 시간에 늦어도 컴퓨터는 절대로 화내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은 없지만 컴퓨터는 그 여자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10년간 운동량, 혈압 추이, 몸무게 변동 추이 등. 의식이 있는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할 수는 있다고 해도 정확하게 할 수 없다. 

사피엔스와 사피엔스의 의식, 거의 모든 직업이 디지털화 될 것이다. 대규모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한치 오차 없는 전 지구적, 전 우주적 디지털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이런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최상위 명령자는 바로 다름 아닌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명령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프로그래밍 될 것이다. 사피엔스의 마음, 의식마저도. 이미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AI, 자율 주행 등. 
이런 날이 오면 사피엔스가 사자, 돼지 같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인간 동물원에 갇혀서 인공지능 컴퓨터가 던져 주는 바나나를 받아 먹을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주인 없는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주인이 오는 기척이 들리면 개처럼 문 앞에서 딸랑거릴지도 모른다. 

알고리즘은 지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편견이 없다. 오류가 없고 감정이 없다. 그리고 정확하다. 
사피엔스의 마음, 의식은 거추장스럽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전작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호모 데우스] 역시 놀라운 책이다.  


9월 02, 2017

덧없음에 대하여

살다 보면 그렇게 될 리 없는 일이, 아직 때가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어제 새벽, 자다가 깨서 시간을 보려고 스마트폰 홈 버튼을 눌렀더니 부재 중 전화 한 통이, 카톡 메시지 두 개가 와 있었다. 새벽이고 잠결이라 화장실만 갔다 온 후 자려고 했는데 부재 중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 잘 때는 스마트폰을 무음 상태로 해 두기 때문에 전화가 와도 알 수가 없다. 급한 일인지도 몰라 확인해 보니 사무실 동료가 한 전화였고 그가 보낸 카톡 메시지였다. 당황스럽게도 지인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예순도 안 됐고 평소 질병으로 고생한 적도 없는데 불과 몇 시간 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술 마시고 장난친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불안한 마음에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 7시가 되었고 그 동료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장난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대는 바람에 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급하게 샤워를 하고 검은 바지 검은 셔츠를 입고 출근했다. 사무실 옆 맥도날드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전 9시경에 공식적인 부고 문자를 받았다. 그제서야 그분이 사망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 빈소에 갔더니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 쓸쓸함을 형언하기 어려웠다. 문상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고 간밤 늦은 시간 날짜가 바뀌는 무렵에 사망했기 때문에 저녁 늦게나 다음날 손님이 많을 터였다. 
고인에게 헌화한 후 절을 하는데 아까는 보지 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영정 아래 국화꽃 옆에 놓여 있었다. 고인은 생전에 커피를 좋아하셨는데 가시는 길에 한잔 드시라고 놓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복받치는 눈물을 참고 있던 터에 커피를 보니 그게 뭐라고, 이제 마실 수 없다는 생각에 고인에게 절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상주들과 맞절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일어나 상주들을 위로하면서 계속 눈물을 쏟았다. 상주들은 예상치 못한 이른 사망 때문에 울었고, 사망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 서러워서 울었고 문상객이 우니 또 따라 울었다. 문상객은 허망해서 울었고, 죽음이 실감 나서 울었고, 상주들을 보니 안쓰러워서 또 울었다.
사람이 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도 추스리지 못한 채 떠나는 사람, 떠나 보내는 사람 가슴은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죽음, 남은 사람이 이토록 애달프고 서러운데 정작 고인은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아무것도 없이 먼 길을 가는 사람, 그 고독을 누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가시는 길에 국화꽃 한두 송이가 무슨 위로가 될 것인가? 커피 한 잔이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국화꽃은, 커피는 고인을 위로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주를 위로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문상객을 위로하는 것인가? 검은 바지, 검은 셔츠, 검은 넥타이, 검은 커피 속에 오롯이 국화꽃만 흰색이었다. 

여느 빈소 영정처럼 고인 역시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고인은 따뜻한 분이었다. 한 번도 화내는 것을 본 적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들은 적 없다. 어쩌면 그런 성정 때문에 화를 삭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쌓아 두었던 것이 심근경색이라는 저승사자를 통해 터진 모양이다. 술 한잔도 못 하시는 분이었고 오직 일뿐인 분이었다. 그러니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쌓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늘 웃는 모습이었고 고혈압 외에 병환이 깊었던 것도 아니라서 사망은 말 그대로 벼락 같은 일이었다. 

덧없다는 말은 곧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의미지만 덧없다는 말 자체가 덧없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지인이 사망했을 때…..등 무언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 때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아주 모자라거나, 갑자기 흘러 버렸을 때도 덧없다고 한다. 우리는 삶이 덧없음을 알게 될 때야 그 소중함도 알게 된다. 애석하게도 미리 알지 못한다. 이 얼마나 덧없는 짓인가? 덧없음을 미리 알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다가 덧없음이 앞에 닥쳐야 겨우 덧없다는 말을 할 뿐이다. 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덧없음을 미리 안다면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것이다. 싫은 사람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거나 싫지만 할 수 없이 만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덧없음이 덧없는 이유는 실재하는 자신이 아닌 남이 원하는 자신으로 살기 때문이다. 자기 부정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실컷 마음대로 산 후에 닥치는 덧없음과 참고 또 참다가 닥친 덧없음은 차원이 다를 터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늘 변하기 마련이다. 누구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인은 변하고 또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뜻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오늘 잘 살아도 내일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덧없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오고 만다. 우리 몸은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체부처럼 정확하게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 온다.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존중하며 살아야 할 터이다. 덧없음은 곧 안주하는 마음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시에 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실은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하여 덧없음이란 말은 참 덧없는 것이다. 
시간은 항상 존재하지만 똑같은 시간이 아니다. 오늘 12시가 내일 12시와 다르다. 오늘 만난 그 사람은 어제 만난 그 사람과 다르다. 오늘 뜬 태양이 내일 뜰 태양과 절대 같지 않다. 

고인은 내일 화장된다고 한다. 뜨거운 불 속에서 한줌 재로 변한 후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떠날 터이다. 無, 하지만 그 재가 다시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서 또 어떤 생명체로 태어날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너무 덧없이 가셨다.  

8월 24, 2017

양과 강철의 숲

‘의사소통’, 사람 마음을 알아 가는 방법이다. 서로서로 마음을 조율하며 산다면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에겐 이런 ‘나’, ‘그녀'에겐 저런 ‘나’. 상대방 마음에 따라 자신을 조율하면 좋지 않을까? 피아노를 조율하듯 나를 조율하면 난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취향 문제야. 피아노에 어떤 소리를 추구하는가, 그건 고객 취향에 달렸어.”

“기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일단은 의사소통이야. 되도록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그 이미지를 제대로 확인해야 해.”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피아노를 조율할 때, 피아노 주인이 원하는 감정을 조율에 실어야 한다. 조율에는 각각 감정이 이입되고 따라서 모든 피아노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피아노도 저마다 혼을 가지고 주인을 닮은 소리를 낸다. 아무리 비싼 악기라도 주인이 고약하면 녀석도 고약한 소리를 내고, 주인이 따뜻하면 녀석 역시 따뜻한 체온을 가지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짧은 이메일도 쓴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글에도 영혼이 실린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고 역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내 혼이 실린, 내 냄새가 밴, 내 숨결이 흐르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기억 속에는 수만 가지 소리가 있다. 거꾸로, 소리 속에도 수만 가지 기억이 있다. 기억은 추억이고 향수다. 기억은 모두 과거이고 미래에 대한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그 기억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잊혀진 소리, 어릴 적 뛰어 놀던 시골, 쪼그려 먹던 뽑기 같은 것, 물장구치던 개울가 같은 곳. 기억은 추억, 그리움을 재생시킨다. 솜이불이 물먹듯이 푹 빠져 든다. 

“물론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 중점을 둘 것인지, 기존 소리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좋아하는 음색을 찾을 것인지요.”

“원래 갖고 있던 소리라는 게 문제야. 고객 기억 속에 있는 소리보다 기억 그 자체가 소중하지 않을까? 어린 딸이 피아노를 연주하던 행복한 기억."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 눈에 맞추는 것, 이런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선 정상에서 환호를 받는 것만 좋은 것일까?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우리 목표는 한결같이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최정상에 서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데, 목표는 한곳을 향한다. 병목 구간에서 한꺼번에 만나게 되면, 90%는 뒤엉켜 쓰러지고 다치게 된다. 

숲에는 지름길이 없다.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종종 갈망한다. 기적의 귀를, 기적의 손가락을 내가 갖고 있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꽃피지 않을까. 머릿속에 그린 피아노 소리를 당장 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내가 목표로 하는 지점은 저 먼 곳에 있는 그 숲이다. 그곳까지 한달음에 갈 수만 있다면. 

무리 속에 있으면 자신도 마치 무리처럼 느껴진다. 확대해 보면 무리 속에 수많은 것이 존재한다. 무리는 스스로 무리가 아니고 작은 존재가 모여 커다란 무리가 된 것이다. 누구나 무리 속 작은 존재일 뿐이며 무리 자체가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한 점일 뿐이고 따라서 공평한 존재다. 무리 속 작은 존재, 그것이 우리가 있을 자리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무리, 그것이 우리가 꿈꿀 자리다. 

산이라고 생각했던 대상 안에 사실은 수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흙이 있고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르고 풀이 자라고 동물이 있고 바람이 분다. 

아무도 조율사의 실력 따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피아니스트가 절찬을 받더라도 피아니스트의 공로도 아니다. 음악의 공로이다. 

용기를 내야 할 것 같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공이 있다면 그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자만하지 말고, 특정인에게 가려진다고 실망하지 말자. 누구도 공은 가지고 있지 않다. 공은 이미 있었던 것뿐이다. 가치! 누구에게는 큰 가치가 누구에게는 작은 가치일 수도 있다. 큰 가치를 가진 자와 작은 가치를 가진 자가 원래 달랐던 것도 아니다. 

“왜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기로 하셨나요?”
“나는 귀가 좋았어. 내 귀는 일류 피아니스트 피아노와 내 피아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내 귀 안에서 흐르는 음색과 내 귀 밖에서 흐르는, 내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음색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어. 그 차이를 도저히 메울 수 없었지.”

가치의 기준은 일반적이지 않다. 하찮은 것과 소중한 것이 시시각각 변한다. 우리는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같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도 매일 다르다. 다름이, 같지 않음이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할 때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 
모든 사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가치 있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누군가도 필요할 것이다. 즉, 조연도, 조연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 보이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가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더 가치 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가치 있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보조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원래 가치 있는 사람이 더 가치 있을까, 아니면 그를 보조해 주는 사람이 더 가치 있을까? 알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가치 있는 사람일 뿐이다. 

“저, 역시 피아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조율사가 되고 싶어요.”
“가즈네의 피아노를 조율하고 싶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다리, 숨결, 이해, 인연. 신화가 아니더라도 기적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욕심을 죽이고 상대방 마음에 내 맘이 닿도록 조율하고 싶다. 차분히,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마음을 조율하면 다가가지 못할 상대가 있을까? 해바라기처럼 상대방 마음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싶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다소 기분이 나쁘더라도, 상대가 높은 ‘도’를 치면 나는 겸손하게 그보다 낮은 ‘라’나, ‘시’ 정도 치면 좋겠다. 

“까치들이 은하수에 다리를 만들어 준다는 설화가 있잖아요. 그렇게 피아노와 피아니스트를 이어주는 까치를 한 마리씩 여기저기에서 모아 오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말과 글로 마음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한다고 해도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정도만 표현되리라! 마음은 마음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마음이 통해야 하고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을 통해서 뿐이다. 하지만 마음은 보여 주기 어렵고 붙잡아 둘 수도 없다. 하여 시간이 흐르면,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담는 그릇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찰칵’ 사진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율은 도무라에게 부탁하고 싶어.”
“피아노는 가즈네가 칠 거야.”

“하겠습니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


8월 12, 2017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처한 환경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바늘 하나 꽃을 만큼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단 한 사람도 얘기할 상대가 없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등졌을 때를  우리는 고독하다고 한다. 고독은 그렇게 절망적인 것이다.  

왜 하필 페루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고 생각해 보니 페루만큼 어울리는 나라가 없을 듯도 하다. ‘페루’, 왠지 아득하게 느껴지고 고독이 절정에 이른 곳처럼 새겨진다. 그 먼 곳에 새들이 날아와서 줄줄이 죽어 간다. 세상의 끝, 죽음은 삶의 끝, 그래서 다시 세상의 끝, 페루!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세상 이치를 다 깨닫고 나니 공허함이 밀려든다. 사랑과 전쟁, 애정과 증오, 삶과 죽음, 어쩌면 세상은 아주 단순한 것들의 반복이다. T.S 엘리엇이 말했던가! 탄생, 섹스와 죽음이 인생의 총체라고…… 나고, 하고, 가고…… 이 한 사이클이 우리 인생이란 말인가? 덧없고 덧없어라.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여자가 여기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데, 이는 스스로에 대한 간청인지도 모르겠다. 애써 죽음을 외면하기 힘들고 이미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기억은 지문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은 건 혼자일 뿐이고…...

그녀는 그를 향해 눈을 들고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남은 눈물로 더욱 맑아진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곳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다가,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들어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리는,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아! 세상은 얼마나 고독한 곳인가?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간다. 조롱하며. 조롱하며. 조롱하며 

“지옥과 저주라네. 이보게, 지옥과 저주란 말이야. 이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군. 그녀와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세. 세상엔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머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나간 것에 대한, 얼마 안 남은 것에 대한, 고독!

마지막 자존심에 대한 고독! 


8월 10, 2017

자기 앞의 생

기뻐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슬픔 속에도 행복이 있다. 작가 에밀 아자르는 그래서 자살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슬픈 행복, 때문에 

행복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머릿속 행복은 내 것이 아니고 그저 욕심일 뿐이다. 머릿속 행복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일 뿐이다. 사람마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서 행복에 대한 정의는 즉,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앞에 보이는 것이 행복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억지로 머릿속으로 행복을 찾으려 마라.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 눈 앞에 보이지도 않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몸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삶은 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피비린내 투성이라도, 남들 눈에 하찮게 보이더라도 앞에 있는 삶이 ‘내’ 삶이다.  

로자 아줌마 집에 있는 아이들은 거의가 다 창녀의 아이들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지방에 가서 몇 달씩 머물러야 했던 그녀들이 떠나기 전후에 자기 아이들을 보러 오곤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데 왜 창녀로 등록된 여자들이 자녀를 키울 수 없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늑대와 양을 동시에 키우고 있다. 늑대는 타인 영혼을 물어뜯기도 하고, 양은 가난한 이에게 털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세상에 태어나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영혼이라는 구세주를 얻었는데 흑인이든 백인이든, 가난한 자든 부유한 자든 모두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삶을 시작한다. 영혼은 생명의 다른 이름이고, 최소한의 명예다. 살아가면서 늑대 때문에 또 양 때문에 영혼의 색깔은 변한다. 어떤 영혼은 투명하고, 어떤 영혼은 걸레처럼 더러워진다. 자기 삶에 주인이 되지 못하고 타인에게 속박되고 구속된다. 영혼은 연탄재처럼 스러지고 서서히 파멸되어 간다. 마른 낙엽처럼 피가 흐르지도 않는 혈관을 드러내 놓고 산산이 부서진다.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펀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잘 벼린 칼로 손을 그었다. 살 틈이 벌어지고 잉크 같은 피가 흘렀다. 피는 투명했고 끈적였다. 피는 소리 없이 울었다. 피는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피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애원한다. 스스로 죽지 못하는 고통, 더러워진 영혼이라고 해도 그 무게는 다르지 않다. 

로자 아줌마는 침대 밑에 히틀러의 대형 사진을 두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어떤 성인에게 의지해야 좋을지 모를 때면 그 초상화를 꺼내서 들여다보았는데, 그러면 큰 걱정거리 하나는 덜었다 싶은 생각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근심 걱정까지 금세 잊을 수가 있다고 했다. 

땅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죽는 연습을 해봤지만, 시멘트 바닥이 너무 차가워 병에 걸릴까봐 겁이 났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죽는 것이 좋을지 사는 것이 좋을지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쉽게 죽지도 못한다. 행복은 삶에서 오지만 삶에서 행복이 오지는 않는다. 삶이 고통보다 처절할 때가 더 많다.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삶은 위태롭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비록 거적대기 같은 삶일지라도 목숨은 가치 있는 것이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지내고 걱정하고 고민하고 울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행복한 것이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모모야. 나는 병원에 진짜 가고 싶지 않아. 그 사람들은 나를 고문할 거야.”
“로자 아줌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프랑스에서는 사람을 고문하지 않아요. 여긴 알제리가 아니라구요.”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놓으려 할 거다. 병원이란 데가 원래 늘 그 모양이야. 법이 그러니까. 나는 필요 이상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 더 살 필요가 없어.”

부조리가 천지에 널렸지만 탓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혼이 마르기 전에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사람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영혼에 값을 매긴다. 영혼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 영혼을 짓밟는다. 더러워져도 살아야 한다. 행복은 삶에서 오는 것이니까.  

로자 아줌마는 동물들의 세계가 인간 세계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동물들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라나. 특히 암사자의 세계가 그러하단다. …… 암사자들은 새끼를 위해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데,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며, 암사자가 새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암사자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 

삶은 미래다. 그래서 자기 ‘앞’의 생이다. 미래가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시간은 미래를 향하고, 과거를 걱정하지 않는다. 행복은 미래에서 온다. 나중에.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8월 02, 2017

편의점 인간

세상이 벽돌 공장이 된 지 오래다. 모두가 똑같이 움직이고 한 방향으로만 간다. 누구도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와 상관없이 갈 길은 정해져있다. 혹여 다른 길을 가려던 참이면 난데없이 비난이 쏟아지고 만다. 
무색무취, 몰개성

학교는 사람을 찍어 낸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답’이 아닌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가장 벽돌 같은 학생이 우등생이다. 벽돌에 본인 감정, 취향, 혼을 실으면 탈락이다.  
회사도 다르지 않다. 회사가 제품을 찍어 내는지 직원을 찍어 내는지 모를 일이고, 직원이 부품처럼 켜켜이 쌓여 회사가 돌아간다. 우리 모두는 사회라는 커다란 기계 속 한낱 부품이 되어 버렸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천편일률적', 이처럼 무서운 말이 또 없다. 생각도, 가치관도, 외모도, 하는 일도, 먹는 음식도 모두 똑같다. 이력서도, 모집 요강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길에서 한치도 엇나가서는 안 된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회색 동선만 끝없이 반복된다. 그래야지 성공한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망하는 첩경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매뉴얼대로 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콩나물시루에 처박힌 인생이다. 톡톡 뽑혀서 사용되는 부품이다. 부품이 고장나면 바로 다른 부품으로 교체된다. 시루에서 뽑기만 하면 된다. 고장난 부품은 얄짤없이 버려진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힁허케 지나간다.  

획일적, 일방적 가치관만 살아 남는다. 내 생각을 말하기 어렵다. 대중 생각과 거리가 있다면 그 비난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 생각과 저 생각이 부딪혀 또다른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부딪힐 생각은 꿈도 못꾼다. 남 생각이 곧 내 생각이다. 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같이 웃어주고 같이 화내주면 동질감을 느낀다. 아무 의미없는 무색투명한 동질감.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때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 

기계 속 부품과 같은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제 스스로 기계가 되지 못한다. 기계 속을 벗어나면 어지럽고 답답하여 어쩔 줄 모른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있다고 해도 타인의 비난을 감수할 만큼 명분을 찾기 어렵다.  

빨리 편의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에서는 일하는 멤버의 일원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관계없이, 같은 제복을 몸에 걸치면 모두 ‘점원’이라는 균등한 존재다.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자신을 위한 삶인가? 사회를 위한 삶인가? 
부품처럼 살다가 고장나고 녹슬면 누가 책임져 주나?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나’는 ‘나’인가, ‘부품'인가? 

이것 봐요.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 프라이버시 따위는 없습니다. 모두 얼마든지 흙발로 밀고 들어와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거나 사냥하러 가서 돈을 벌어 오거나, 둘 중 하나의 형태로 무리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이단자예요. 그래서 무리에 속한 놈들은 얼마든지 간섭하죠.”


언젠가 내가 편의점 판매대 위에 진열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진열되면 다행이다. 1+1 제품의 뒤쪽 1이 되거나 아예 폐기처분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7월 31, 2017

영초 언니

영초 언니는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 몸바친 투사다.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하에서 그녀는 오직 독재 타도, 민주주의 쟁취라는 명분으로 몸을 불살랐다. 

작사 서명숙 씨는 순전히 최순실 ‘그 여자’ 때문에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여기는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라고 말한 것 때문에 말이다. 서명숙 씨와 동시대를 살면서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한 사람들이 볼 때 최순실 같은 사람이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 것이 얼마나 같잖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최순실 따위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최순실 같은 사람이 법대로 처벌 받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다. 

민주주의 국가는 모든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나라다. 우리보다 조금 먼저 사신 분들은 한때 말과 행동, 생각까지 통제 받고 살았다.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합리적으로 생각을 나누고 이해하는 것이다. 국가가, 사회가 특정 틀에 개인을 가두면 안 된다. 개인도 다른 개인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 즉, 이해와 설득으로 한발짝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느리고 어렵다. 

책을 읽는 내내 고통이 가슴을 찔렀고 책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무릇 하찮은 듯하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다른 철학, 사상, 가치관을 강요한다면 그 고통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클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치나 국가에 한정되어 적용되는 가치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숨 쉬는 모든 곳에서, 인간으로 사는 평생 동안 우리와 함께 할 가치다.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 민주주의를 누리는 것은 영초 언니와 같은 분들이 희생한 덕분이다.   


7월 29, 2017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발칙한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 소설은 비교적 읽기 무난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를 먹고,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크게 보면, 삶과 죽음 두 가지뿐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주제만 남는다.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무한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삶에 대한 애착은 커진다. 병이 생기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그 애착은 더욱 커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느끼지 못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 하루가 그 하루일 뿐이다. 비로소 끝이 보이기 시작할 때 이기적인 애착이 가슴속에 돋는다. 

“클래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 없지는 않다, 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틀림없이.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아무리 삶에 대한 애착이 크다고 해도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길 없다. 하여 좌절하게 되고 머지않아 포기하게 되며 결국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자연사든, 병사든, 사고사든 그날은 꼭 오고야 만다. 산다는 것은 곧 죽음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이다.
죽음은 곧 무(無)를 의미하는 것이다. 딱 한 번 유(有)가 있고 영원한 무(無)가 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죽음을 준비하고 살지 않기 때문인지 애절함이 없다. 삶이 곧 끝난다고 생각하면 세상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어떤 것도 의미 있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토록 소중한 하루하루를 우리는 얼마나 헛되이 보내고 있는지.

“죽음을 마주하면서 좋았던 점이라면 매일매일 살아 있다고 실감하면서 살게 된 거야.”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드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삶이 끝나가는 시점에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로 가득찰 것이다. 자신 인생에 대한 책임, 주변 사람에 대한 책임.
타인과 어울리는 삶, 나 혼자가 아닌, 주변인과 어울리는 삶. 그들이 있어 내 삶은 작은 역사가 된다. 

그녀는 타인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온 인간이다. 표정이나 인간성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에 반해 나는 가족 이외의 모든 인간관계를 머릿속의 상상으로만 완결시켜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모두 나만의 상상이고, 내게 위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타인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포기한 채 살아왔다. 그녀와는 정반대로,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으로 괜찮으냐고 굳이 묻는다면 좀 난처하긴 하지만.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 텐데 나는 분명코 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했고, 그 끝에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이전과는 달라진 나로서 이곳에 존재한다…….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사실은 풀입 배 따위가 아니다. 휩쓸려가는 것도 휩쓸려가지 않는 것도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한다.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그녀였다. 

혼자가 아닌 삶,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 내 의지로 사는 삶. 꽃처럼 슬프지만 영원을 향해 스러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따뜻한 끈, 인연.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죽더라도 영원히…… 


7월 26, 2017

디지털 라이프

'아날로그는 감성적이다', 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슨 감성? 감성적이라고 해도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이 나는 더 좋다.
예전에 어떤 배우가 TV에서 자기는 디지털이 싫어서 아직도 손 편지를 쓴다고 하는 걸 본 적 있다. 손 편지를 쓰든, 이메일을 쓰든 그분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디지털은 메말랐고 손 편지는 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손 편지든, 이메일이든 그 내용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필요하다면 더 효율적인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수고스럽고 번거로운 것은 정성이 있는 것이고, 이메일로 보내면 정성이 부족한 것인지. 그때 그분은 아직 스마트폰을 안 쓰고 파발이나 봉화를 쓰는지 모르겠다. 그런 뉴스를 본 적 없으니 그분도 아마 스마트폰을 쓰는 듯하다. 

신용카드, 비행기, 자동차, 스마트 폰 등 디지털 없이 굴러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종이 책도 디지털로 빚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옛것을 보면 향수를 느끼고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굳이 디지털이 싫다고 표현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본인이 그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잘 모른다고 해서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실 위 글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아래 여섯 가지는 내게 반드시 필요한, 매일 사용하는 생산성 도구이다. 물론 대체 가능한 다른 도구도 많이 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정착한 앱이다.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은 딱 백 권이다. 현재 백 권째 책을 읽는 중이다. 백 권 중 두세 권을 제외하고 전부 전자책으로 읽었다. 읽고 싶은데 전자책으로 나와 있지 않은 것만 종이 책을 사서 읽었다. 전자책에 적응되어 이제 종이 책은 읽기가 싫다. 무겁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연말까지 이백 권을 읽을 목표를 세웠는데 전자책이 큰 도움이 됐다. 전자책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독서가 가능하다. 
스마트폰을 늘 휴대하기 때문에 장소불문 독서가 가능하다. 이는 가장 큰 장점이다. 책을 더 많이, 더 자주, 더 빨리 읽으려면 전자책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자동차 대시보드 위 휴대전화 거치대에 스마트폰을 걸어 놓고 출퇴근길에 독서를 하면 차가 막혀도 짜증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물론 차가 달릴 때는 읽을 수도 없고 읽어서도 안된다. 차가 서행하거나 신호 대기 중일 때 짬짬이 독서를 해도 상당한 양을 읽을 수 있다. 

휴대가 편하다. 
스마트폰 메모리가 허락하는 한 몇백, 몇천 권도 가지고 다닐 수 있다. 메모리가 부족하다면 불필요한 책은 지우면 된다. 나중에 얼마든지 다시 다운 받을 수 있다. 책을 로컬 메모리에 다운 받기 때문에 읽을 때 전파가 필요 없다. 집에 책을 쌓아둘 필요가 없는 것 역시 아주 큰 장점이다. 백 권이라고 해도 상당한 공간을 차지한다. 

모든 장치에 동기화 된다.
맥, 아이폰, PC, 태블릿 등 모든 전자 장치에서 동기화가 되므로 이 장치에서 저 장치로, 저 장치에서 이 장치로 필요할 때마다 옮겨 읽을 수 있다. 책상에서 맥으로 읽다가 화장실 가서 아이폰으로 이어서 읽을 수 있다. 집에서 맥으로 읽다가 커피샵 가서 아이폰으로 이어서 읽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당연히 가능하다. 물론 종이 책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전자책 대비 불편하다. 
 
화면 최적화
전자책은 해당 장치 화면에 자동으로 최적화되기 때문에 종이 책보다 훨씬 보기 편하다. 자기는 노안이라 전자책은 못 본다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건 틀린 말이다. 글자 크기 조절도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크기가 고정된 종이 책보다 훨씬 보기가 좋다. 

메모 및 검색 용이
메모하기 편하고 필요한 내용은 캡처해서 보관할 수 있다. 검색이 가능하다는 것 역시 큰 장점 중 하나다.
  
사자마자 바로 읽을 수 있다. 
번거롭게 서점에 왔다갔다 할 필요가 없다. 

가격이 저렴하다. 
종이 책 대비 약 30% 정도 저렴하다. 책을 많이 읽는다면 이 금액을 무시 못 한다. 

모든 자료를 에버노트에 정리한다. 정리하기 편하고 찾기 편하다. 늘 액세스가 가능하다. 
신용카드, 보안카드도 에버노트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 찾아 본다. 위험하지 않냐고 하는데, 내 생각엔 신용카드, 보안카드를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이 천만 배는 더 위험하다. 
이력서 관리에 최적이다. 
프로젝트 관리에 최적이다. 
개별 노트를 링크로 연결하면 아주 편리하다. 
자료 분산, 파편화를 피할 수 있다. 
검색이 용이하다. 'cmd + J' 검색은 정말 편하고 빠르다. 
에버노트는 아주 간단한 메모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요일 아침 동네 목욕탕에 가는데 정장을 입고 갈 필요는 없다. 간단한 메모는 다른 앱을 쓰는 게 좋다.(구글 킵, 아이폰 기본 메모 앱 등)

모든 할 일은 여기에 정리한다. 할 일이 생각나면 일단 분더리스트에 적는다. 그리고 해야 할 날짜를 맞춰 두면 끝. 뇌를 비울 수 있다. 
매주, 매월, 매년 반복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복 설정이 가능하다. 최초 한 번만 설정하면 해당 날짜에 맞춰 오늘 할 일에 나타난다. 
간단한 메모가 가능하다. 굳이 다른 앱을 쓸 필요없이 분더리스트에서 메모할 수 있다. 
할 일 외에도 다양한 리스트를 만들 때 좋다. 예를 들어 점심 메뉴, 맛집 정리, 읽을 책, 살 것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 
파일 첨부가 가능하고 공유 및 태그도 가능하다. 
Things, Omnifocus 같은 걸출한 앱이 있지만 비싸다. 분더리스트는 무료 버전으로도 충분히 값지게 쓸 수 있다. 

모든 일정은 여기에 기록한다. 종이 달력은 안 쓴다. 
모든 캘린더 앱은 기본적으로 구글 캘린더를 지원한다. 필요에 따라, 본인이 좋아하는 앱을 쓰면 된다. 웹 버전도 충분히 편리하다.  
매주, 매월, 매년 반복해야 할 일정이 있다면 반복 설정이 가능하다. (예. 카드 결제일, 생일 등) 

대략 지난 10년 동안 모든 일정이 구글 캘린더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지난 일정을 찾아보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도 가끔 예전 일정을 찾아 보면서 흐뭇해 할 때가 있다. 종이 달력에 볼펜으로 적는 것보다 깔끔하고 보기 편하고 수정하기 좋기 때문에 쓴다. 종이 캘린더에 삐뚤삐뚤 쓴 것은 보기 흉하다. 고치려면 줄을 그어야 한다. 보기 싫다. 무엇보다 종이 달력은 그 달력에서 벗어나면 볼 수가 없다. 아니면 종이 달력을 항상 지니고 다닐 수밖에. 

파일 백업용이며 간단한 문서 작업용이다. 
파일 대부분은 에버노트에서 관리하지만 혹시 몰라서 구글 드라이브에 백업한다. 자동으로 백업되니 불편하거나 번거롭지 않다. 
무엇보다 사진 저장용으로 최고다. 스마트폰에서 찍은 사진은 전부 자동으로 백업된다. 이거 하나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게다가 '고화질 저장'으로 설정하면 비용 없이 무제한 저장이 가능하다. 

카톡, 슬랙 등이 있지만 그래도 이메일 커뮤니케이션만 한 건 없다. 진득이 고민해서 한 줄 한 줄 쓴 메일이 좋다. 
메신저는 너무 즉흥적이다. 생각을 정리해서 얘기를 나누기 어렵다. 가벼운 얘기라면 메신저를 쓰면 되지만, 깊이가 있는 얘기, 업무에 관련된 내용은 메일로 나누는 것이 정석이다. 
메신저는 상대방에게 ‘빨리 대답해줘’ 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생각할 시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이 예의다. 
메신저로 상대방 업무를 방해하지 마시라.  

적고 보니 리디북스와 에버노트만 유료로 사용 중이고 나머지는 전부 무료로 쓰고 있다.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본인 편한 대로 쓰면 된다.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7월 17, 2017

다낭 여행

2018년 1월에 친구 세 명과 베트남 다낭 여행을 하기로 했고 이미 항공권 구매까지 마친 상태였다.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홈쇼핑에서 다낭 패키지 여행을 덜컥 구매하고 말았다. 하여 나는 계획에 없던 답사 아닌 답사를 다녀오게 됐다. 
집에 마땅한 캐리어가 없어서 소셜커머스에서 28인치, 24인치, 20인치 등 각각 하나씩 구매했다. 락앤락 제품인데, 거대한 반찬통으로 오해 받기 십상이다. 여름 짐이라서 그런지 28인치 하나에 세 식구 짐이 거의 다 들어갔고 기내에서 혹시 필요할 수도 있는 물건만 20인치에 챙겼다. 24인치 캐리어는 필요 없었다. 반바지 두 장, 티셔츠 세 장을 새로 샀고 온갖 약도 잘 챙겼다. 내 핀잔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김치, 깻잎, 컵라면 같은 것을 챙겼다. 누가보면 피난 가는 줄 알겠다고 퉁바리를 주었으나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는 이어폰과 보조 배터리 정도만 챙겼다. 짐 챙기는 것만으로도 이미 베트남에 간 것 같았고 아이와 함께 하는 첫 번째 해외여행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꽤 설렜다. 

이스타항공이 다낭-인천 신규 취항을 했는데 인천에서 오후 6시 30분 출발이다. 소위 저가항공은 예전에 진에어를 타본 적이 있었다. 제주행 비행기였는데 딱히 불편함이나 공포(?) 같은 것은 없었고 합리적인 가격인 만큼 탈 만하다고 느꼈다. 깐깐한 보안검사을 마친 뒤 면세점에 잠시 들렸고 다낭을 향해 비행기는 출발했다. 다소 좁기는 했어도 다낭공행 내릴 때까지 불편함 없는 여행이었다. 약 4시간 30분 정도 비행인데 별 지루함 없이 시간이 흘렀다. 오는 비행기는 현지 시간으로 오후 10시 30분 출발인데, 무려 1시간 30분이나 지연됐다. 밤을 꼬박 세워 날아와 날이 희붐한 오전 6시 4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오니 시차가 겨우 두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피곤했다. 평소 잠을 잘 못 자는 형편이라 불편한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못 잤고 인천에 내리니 온몸에서 진이 빠졌다. 입국 수속을 다 마치고 짐을 찾으러 갔는데 그때까지 짐이 준비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겨우 28인치 캐리어가 뱅글뱅글 도는 벨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가항공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다소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비행 자체는 괜찮은데 사소한 몇 가지는 불편했다. 하나 감수할 만하다. 

다낭공항을 빠져 나가니 여행사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한국 사람이고 또 한 명은 베트남 현지인이었다. 선후배로 보이는 남자 네 명, 중년 부부 한 쌍, 엄마와 딸 둘, 그리고 우리 가족 세 명 등 모두 12명이 패키지 여행이라는 명목 하에 며칠 동안 유효한 임시 가족이 되었다. 행운인지 몰라도 일행 모두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시간 잘 지키고 개인 행동 안 하고 팀에 불편함을 주지 않았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 다만 모든 엘리베이터가 전층을 운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복잡한 시간에는 타기가 영 불편했다. 호텔인데, 욕실 한쪽 면이 우리나라 모텔처럼 유리로 되어 있었다. 살짝 당황했는데 마침 블라인드가 있어서 창을 가릴 수 있었다. 아이는 샤워할 때 일부러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을 노크해서 엄마 아빠 시선을 자기 쪽으로 모았다. 욕조 안에서 까불거리는 녀석은 행복해보였고 따라서 나도 행복했다. 하우스 키퍼가 아침에 청소할 때마다 블라인드를 올려두어서 매일 저녁 내가 다시 내려야 했다. 이러구러 첫날이 지났다. 

여행좀 했다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한국에서 100달러짜리로 환전을 하고 베트남 현지에서 다시 동(VND)으로 바꾸는 것이 제일 좋다고 했다. 내가 오백 달러, 집사람이 오백 달러 해서 총 1천 달러를 환전했다. 이후 현지에서 우선 삼백 달러를 베트남 동으로 환전했다. 베트남 동은 단위가 너무 커서 계산하기 불편했다. 또 대부분 달러로 결제가 되기 때문에 베트남 동은 없어도 그만이었다. 작은 구멍가게, 노점상도 달러를 다 받았다. 괜히 이래저래 환전하느라 수수료만 나간다. 다음 여행 때는 달러만 준비할 것이다. 

베트남 첫인상은 그냥 평범했다. 우리나라 시골 마을 같았고 요즘 서울 더위 정도였다. 이국적인 분위기는 별로 느낄 수 없었다. 베트남 사람은 친절했고 소박했고 순수해보였다. 오래전 일이지만 베트남전쟁 때 한국은 적국이었다. 혹시라도 한국인을 불편해 할까 걱정했는데 그런 인상은 전혀 못 받았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베트남 사람 대부분은 한국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다. 외국인에게 곰살궂진 않아도 헤실헤실 잘 웃어 주었다. 베트남은 마치 70년대 같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도로는 언뜻 매우 복잡해 보였지만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다. 마구자비로 유턴을 하는데도 다른 차가 기다려 주고 빵빵거리지 않았다.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나라였다면 아마 욕설이 난무하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복잡한 듯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우리 버스를 운전하는 베트남 기사분은 순박해 보였고 운전도 차분하게 잘했다. 현지 가이드 역시 아주 친절하고 소박했다. 더불어 한국어도 비교적 능숙했다. 2년 정도 한국어를 배웠다는데 잘하는 수준이었다. 비자 받기가 어려워서 한국에는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에 온다면 내가 가이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이드가 여자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베트남 커피는 그 맛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마셔본 커피는 커피가 아니었다. 맛이 풍부하고 진했고 쓴맛이 전혀 없었다. 알고 보니 베트남 커피 생산량은 세계 2위 수준이었다. 뭐든 산지에서 먹는 것이 최고 아니겠는가! 베트남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 딱 하나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커피 맛을 꼽겠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 맛이 자꾸 생각난다. 커피를 좀 사 올까 생각했지만 한국에서 그 맛을 낼 도리가 없어 보여 포기했다. 
쌀국수는 한국에서 먹는 거랑 보기에도, 맛도 많이 달랐다. 현지 쌀국수가, 당연한 얘기지만, 훨씬 맛있었다. 면도 많이 다르고 국물 맛도 완전히 달랐다. 더 깊고 풍부했다. 면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호텔에서 매일 아침 종류가 다른 쌀국수가 나왔지만 현지인들이 먹는 일반 식당에서는 먹어 볼 기회가 없어 아쉬웠다. 한국에서 파는 베트남 쌀국수는 아주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다.  
완전 베트남 현지식도 한 끼 먹었는데 밥을 빼고는 내 입에 맞지 않았다. 우리나라 시골밥상 엇비슷하게 나오는데 특정 반찬 한두 가지를 빼고는 먹기가 불편했다. 

호텔 화장실은 당연히 현대식이고 아주 깨끗하다. 그 외 베트남 화장실은 대부분 수세식이나 구식이다. 구식 화장실이지만 냄새는 전혀 없었다. 보기에는 냄새가 진동할 것 같지만 전혀, 진짜 1만큼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화장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어딜 가도 와이파이는 다 됐다. 와이파이 안 되는 식당, 커피삽은 한 곳도 보지 못했다. 베트남엔 아직 LTE가 안 되고 3G만 되는데 3G도 느리고 불안했다. 여행 중 전파에 너무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 딱히 불편한 줄은 몰랐다. 혹시 베트남을 간다면 굳이 데이터 로밍을 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할 것 같진 않다. 전파가 급하면 대충 아무 가게나 들어가면 와이파이가 된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다낭에 볼거리는 별로 없었다. 관광지 대부분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굳이 안 봐도 그만인 정도였다. 다음에 간다면 관광보단 휴식 중심으로 일정을 짜고 싶었다. 마사지는 두 번 받았는데 다 좋았다. 마사지라는 것이 아무리 받아도 물리지 않는 것이니. 마사지하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려 보였는데 손결이 거칠었다. 하도 마사지를 많이 해서 굳은살이 생기지 않았나 싶었다. 그녀들은 대부분 생급스럽지 않고 허룽대지도 않았다. 팁 때문에 얼찐거리진 않았지만 5천 원 정도 주니까 아주 좋아했다. 팁을 받을 때 흘리는 미소가 백옥 같이 순수해보였다. 때묻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피곤한 인생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음만은 풍족해 보였다. 한국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여유가 넘쳤다.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처음과 달리 하루, 이틀 지내고 보니 베트남 사람 대부분이 여유로워 보였다. 소득이 더 높은 한국 사람보다 행복해 보였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베트남엔 비가 지짐대는 경우가 잦아서 휴대가 편한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 잠깐 후드득거리다가 그치기 때문에 여행에 큰 불편은 없다. 그 외 특별한 준비물은 필요 없다. 

여행은 추억을 남기는 한편 긴 아쉬움을 남긴다. 마음속에 더께가 너무 두꺼워서 쉬이 떠나지 못한다. 떠날 여유는 없고 떠나지 못할 구실은 많다. 복잡하고 신경질적인 한국에서 그런 여유를 쉽게 만들지 못한다. 짧은 여행이지만 추억이 어룽져 당분간 가슴이 따뜻할 터이다. 

눈을 감으면 베트남에서 마신 커피가 떠오르고 파란 남중국해가 보이며 순박한 베트남 사람들이 보인다.  

7월 01, 2017

깊은 강

상처 입은 영혼을 가진 사람, 납덩이처럼 무거운 슬픔을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둔 사람. 죽음, 이별, 질병, 고독, 전쟁 같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픔은 가슴속 깊이 떠있다가 뼈를 저미는 고독과 함께 거북 목처럼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이소베는 아내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댔다. 숨이 끊어질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띄엄띄엄 뭔가 말하고 있다.“나…… 반드시……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찾아요…… 날 찾아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구원을 바라고 환생을 바라고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
고독은 때론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도 한다.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한다. 
절망이라는 늪은 모든 것을 빨이들이지만 영혼을 구원할 희망을 찾아야 한다. 

밤이 깊도록 작업을 계속하는 누마다와 이를 응시하는 코뿔소새와의 영혼의 교류를 아내가 이해할 리 없었다. 누마다는 어떤 부부건 간에, 서로 용해될 수 없는 고독이 있음을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알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고독과 이 새의 고독은 밤의 정적 속에서 서로 통한다. 

누마다는 아내한테 미안했다. 소년 때부터 누마다는 늘 인간이 아닌 개나 새한테 마음의 비밀을 털어놓곤 했다. 이번 경우에도, 거듭되는 수술의 실패로 우울해진 기분을 그 코뿔소새 같은 새한테 고백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내는 어느 틈엔가 꿰뚫어 보았다. 

질병은 사람을 피폐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든다. 똥, 오줌 가리는 것도 사치스럽게 만든다.
전쟁은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간다. 
죽음은 때로 희망이고 휴식이다. 환생을 믿는다면 죽음은 또 다른 기회임이 분명하다.  

두어 달 전에 인도 북쪽 카무로지 마을에서 일본인으로 전생을 살았다는 소녀의 이야기가 보고되었습니다. 다만 그녀가 오빠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이 네 살 때여서, 저희가 전생 기억자의 조건에 넣은 세 살까지의 나이를 넘긴 탓에 조사대상에서 제외했으나, 만일을 고려해 당신의 요청대로 연락드립니다. 그녀의 이름은 라지니 푸니랄, 그녀의 생가가 있는 카무로지 마을은 갠지스 강변 바라나시 근처에 있으며……”
  
왔다가 가는 것은 신이 준 당연한 이치지만 삶과 인생을 공유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다. 죽음이 안타까운 건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흔적은 지워지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더 크게 갑자기 소나기가 오듯 나타난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간절함을 배운다. 비록 때가 늦었더라도.  
바람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과거에 대한 회상. 회상은 늘 아쉬움을 남기고 후회를 그려낸다. 미련이 남은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무엇을 바꿀 것인가!
시간은 이미 흘러서 되돌릴 수 없는데 가슴은 허위허위 공허하다. 

정신적 구원! 
간절함이 하늘에 닿으면 뜻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갠지스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 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 침묵의 비(碑)


6월 26, 2017

묵호항

동해고속도로 망상IC를 빠져 나와 시내 쪽으로 우회전해서 십 분 정도 차를 달리면 묵호항이 나온다. 묵호항에는 생선 냄새와 바다 냄새가 합쳐진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나는 그 냄새가 좋다. 메슥거리는 비린내를 한참 덜어낸, 기분 좋은 비릿함이다. 들큼하고 달곰한 것에 사람 냄새까지 더해지니 마치 품속처럼 아늑하다



괴괴한 밤에 바닷가로 나가면 수평선 멀리 엄청난 빛을 뿜는 배가 복달거리며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오징어잡이 배다. 마음 같아선 그 배에 한번 타보고 싶기도 하지만 태워 줄 리 만무하다. 만선을 위해 새벽잠 설치며 파도에 맞서 고기 잡는 이들의 팥죽 같은 땀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자음 ‘ㅅ’ 같은 테트라포드가 도열해 있는 방파제 끝에는 붉은색 등대가 우두머리처럼 우뚝 서있다. 등대 맨 꼭대기에는 갈매기떼가 망원경도 없이 동해바다를 시찰하고 있다. 거대한 테트라포드는 ‘쏴아쏴아’하는 파도 소리가 방파제에 부딪혀 자음 ‘ㅅ’만 남은 것 같은 모양새다.  켜켜이 쌓여 있는 테트라포드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듯 보이고 그 벽면을 따라 개미만큼 작은 게들이 행군을 하기도 한다. 이 게들에게 테트라포드는 만리장성과 다름없다. 이놈들이 테트라포드를 보고 훈민정음을 깨닫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저 거대하고 많은 테트라포드를 어떻게 옮겼고 저렇게 마침맞게 쌓았는지 참 모를 일이다. 
방파제 옆을 돌면 바닷가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바짓단을 걷고 찬물에 발을 담그면 노곤했던 몸이 그 선득함에 화들짝 놀라 천년 묵은 피로도 히뜩 사라진다.  욕심에 조금 깊은 곳으로 발을 내딛다 보면 어느새 파도가 무릎까지 차올라 빨랫감이 늘어난다. 

묵호항 바로 옆에는 횟감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여럿 모여 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어판장이라고 한다. 어판장 한쪽에는 아주머니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어판장에서 산 횟감을 즉석에서 먹기 좋게 떠준다. 그런 냄새가 모여서 비릿한 추억이 된다. 바다 냄새, 사람 냄새, 인생 냄새. 냄새만으로 이미 자연산 회를 한 접시 먹은 듯하다.  

어판장 앞에는 건어물을 파는 노점상이 여럿 있고, 그 와중에 호박엿을 파는, 틈새시장을 노리는 아저씨도 있다. 가윗소리가 어찌나 경쾌한지 안 사곤 못 배긴다. 울릉도 호박엿이라고 하는데 굳이 브랜드 마케팅을 안 해도 맛이 좋다. 그 동네 사람들이 ‘피데기’라고 하는 반건조오징어는 그 맛이 참 기막히다. 딱딱하지 않아서 씹기 편할 뿐더러 성냥개비 같은 초고추장을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 동해바다를 통째로 삼킨 듯하다. 

배가 정박해 있는 묵호항 근처를 어정버정 하다 보면 낚시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비트적비트적 걸으면서 뽕짝을 한가락 하는 아저씨를 만나기도 한다. 어렵사리 고기가 낚이는데 대부분 작은 고기다. 보고 있으면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 생각도 나고 인생이 뭐 별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묵호항 건너편에 조그만 시장이 있고 시장 어귀에서 건어물을 파는 할머니가 계신다. 처가에 갈 때면 그 앞을 지나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유찬이 왔나!” 하시면서 우리 아들에게 만 원짜리를 덥석 쥐어 주신다. 일년에 한두 번 겨우 방문하는데 어떻게 아들 놈 이름을 기억하시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오만 원권이 생기면서 아들 수입이 다섯 배로 늘었다. 누구에게 감사할지 몰라 난 우선 조폐공사 사장님을 떠올렸다. 그 돈 모아서 녀석은 자전거 사는 데 보탰고 컴퓨터 사는 데 보탰다. 

시장 반대편 끝에 은성목욕탕이라고 있다. 목욕탕 입구 옆에 마치 붙박이장 같은 개집이 있고 그 안에 사나운 개가 있는데 내가 개띠인 걸 아는지 나를 보면 엄청나게 짖어댄다. 그때마다 난 “네가 ‘개’라서 여태 살아 있는 거야. ‘게’였다면 넌 벌써 내 밥이 됐다.” 라고 말하며 더 짖기 전에 조심스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다. 
목욕탕 안에는 열탕, 온탕, 냉탕이 각 하나씩 있고 그 유명하다는 핀란드식 증기 사우나도 있다. 한켠에 신기한 물건이 있는데 이른바 자동 때밀이다. 둥근 접시 모양에다 까칠한 때수건을 입힌, 장영실도 울고 갈 세계적인 발명품이다. 대야에 찬물 한가득 담아서 접시에 흩뿌린 후 등을 기대면 접시가 돌면서 시원하게 때를 민다. 대중화가 안 된 걸 보면 그리 성공적인 발명품은 아닌 것 같다. 하여 장영실은 의문의 일 패를 벗어났다.  

그 시골 작은 항구도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는 제법 차가 막힌다. 검정색 비닐 봉다리에 든, 갓 손질한 횟감을 바투 잡고서 차에 오르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행복이 묻어난다. 얼마 전에 가보니 그 방파제 옆에 구식 횟집을 정리하고 깔끔한 새 건물을 올렸는데 왠지 어색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다림질한 듯 말쑥한 횟집이 시골 항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이러구러 하루가 지나는 묵호항에는 늘 ‘오도독 오도독’ 회 씹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께느른한 몸을 이끌어 서울로 돌아오면 묵호항 냄새가 며칠 동안 떠나지 않는다. 여느 시골처럼 묵호항에도 젊은이는 보이지 않고 노인들뿐인데 내 머릿속 그 풍경이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다. 묵호항에서 태어난 아내와 99년에 결혼했고 매년 한두 번 갔으니 아마도 삼사십 번은 간 모양이다. 

세상 싫을 땐 거기 가서 혼자 아무 생각 없이 며칠 묵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6월 24, 2017

두 남자와 자전거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 녀석은 정리정돈 안 하고 어지럽히기 대마왕이다. 양말은 저쪽에 팬티는 이쪽에. 책상 위는 과자 봉지, 책, 노트, 볼펜 등으로 늘 엉망이다. 사실 대마왕까지는 아니고 그 또래에 다 그런 정도. 하여튼. 

녀석에게 자전거를 한 대 사주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자전거는 늘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자전거에 대한 욕심이 커져 갔고 좋은 자전거로 기변을 노리고 있었다. 좋은 자전거란 곧 비싼 자전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들 놈 친구 아빠가 마침 삼천리자전거 본사에 근무하는 분이라서 기존에 타던 자전거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었다. 집사람은 다시 그분에게 부탁하자고 했지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던 참이었다. 또한 녀석이 원하는, 사고 싶은 자전거는 따로 있었다. 

나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는데 자전거로 유명한 동네였다. 동네방네 자전거 없는 집이 없고 등하교 시간 아스팔트에는 마치 피난민 같은 자전거 행렬로 가득했다. 아마 전국에서 가장 먼저 자전거 도로가 생긴 동네일 것이다. 지금은 자전거박물관도 있다. 그래서 자전거에 익숙하지만 나는 자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 자전거를 한 번도 가진 적 없다. 

녀석에게 자전거를 사주기로 하고 어떤 자전거를 원하는지 물었더니 글쎄 인터넷 쇼핑몰에서 몇 가지 고른 후 링크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보니까 팔십만 원이 넘는 것도 있고 제일 싼 게, 그러니까 자기 딴에 제일 후순위였던, 오십만 원 정도였다. 물론 엄청나게 비싼 자전거가 많은 걸 안다.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자전거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녀석에게 백만 원 가까운 자전거를 사주기는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녀석이 휴대전화 액정을 깨먹었다. 벌써 몇 번짼지. 수리비가 15만 원 정도 나왔는데 너무 화가 나서, 액정 깨진 것 자체보다 조심성 없는 것 때문에 화가 났다, 벌로 올해 자전거 사주기로 한 것은 취소라고 말했다. 녀석은 별말은 없었지만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며칠이 지나 하도 마음에 걸려서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고 제일 후순위인 50만 원 정도하는 자전거를 주문했다. 그 자전거가 주문 삼일만인 그제 집으로 배달이 됐다. 요즘은 자전거가 완전 조립 상태로 배송이 된다. 집에서 간단하게 페달만 달면 바로 탈 수 있도록.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녀석이 거실 바닥에 자전거를 거꾸로 눕혀 두고 여기저기 물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천방지축 중1이 자전거를 닦고 있다니. 사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하고 모처럼 외식을 하고 집에 왔는데 녀석이 크로스백을 주섬주섬 하더니 잠시 동네 공원에 갔다 오겠다고 한다. 크로스백을 열어 보니 온갖 공구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딴에 스스로 정비를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현관문 앞에 이전에 타던 자전거가 아직 있는데 그걸 보면서 녀석이 껄껄 웃는다. 마치 이런 똥 같은 것을 어떻게 타고 다녔는지 한심하다는 듯이 말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쓰는 맥북 프로는 이백만 원짜리고, 아이폰은 백만 원 언저리에 샀다. 타는 차는 약 6년 전에 이천오백만 원을 주고 산 것이다. 아이에게 그 정도 자전거를 사주지 않을 명분은 내게 없었다. 

아이 휴대폰을 구매하면서 분실, 파손보험을 들었는데 보험료가 입금이 되어서 사실상 액정 수리비는 별로 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아이한테 하지 않았다. 
50만 원짜리 자전거를 주문하고 나서 애하고 굳게 약속을 했다. 
“엄마한테는 30만 원에 샀다고 말해.”



내 막냇동생은 6년간 암 투병 끝에 2014년에 죽었는데, 암 수술 후 운동할 요량으로 자전거를 탔었다. 
한 이백만 원 정도 하는 자전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열심히 탔다. 아침 먹고 자전거, 점심 먹고 자전거, 저녁 먹고 자전거였다. 자전거 동호회도 들었고 들로 산으로 매일 자전거 타는 게 일이었다. 매일 그렇게 3, 4년을 탔다. 살아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 죽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동생은 결국 재발 및 전이로 죽었다. 

죽기 몇 달 전 동생이 카톡으로 자기가 타던 자전거 사진 여러 장을 보내왔다. 휴대폰 카메라로 곱게도 찍어 보냈다. 앞 사진, 옆 사진, 뒷 사진 등 골고루 꼼꼼하게 찍어 보냈다. 어디서 찾았는지  말끔한 곳을 배경으로 바윗등 같은 곳 위에 자전거를 얹어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타던 자전거를 중고나라 같은 데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뭔지 그때 깨달았다. 동생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도저히 그 자전거를 중고나라에 올릴 수 없었다. 
카톡에 이런 메시지가 함께 있었다. 
“형 미안해. 자전거 판 돈으로 형 용돈이나 해."

동생이 죽은 후 카카오 스토리를 살펴봤더니 사진과 글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늘로 가기 전에 미리 다 지운 것이다. 왜 지웠을까 궁금했지만 때가 늦어 물어볼 수 없었다. 그 고독했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현생을 모조리 지우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다.  
동생 카스에는 다만 딱 한 장 사진이 남아 있었다. 프로필 사진이었다. 


동부간선도로와 나란히 중랑천변으로 자전거 도로가 있는데 출퇴근길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저 사람들은 건강할까? 뭐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자전거를 탈까 생각하곤 한다.  
자전거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 그게 무엇이든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동생이 타던 자전거를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 옆에 뒀어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지금 그 자전거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다.   

6월 19, 2017

마티네의 끝에서

흔히, 운명이라고 하고 인연이라고도 한다. 
운명이라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인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여 우리는 운명이나 인연이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된다. 운명과 인연이 늘 해바라기처럼 웃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반대로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이 운명과 인연을 바뀌게 하는 수레바퀴일 수도 있다. 바뀐 후나 바뀌기 전이나 모두 운명인 건 마찬가지다. 갈림길에서 한쪽을 택하는 경우 나머지 한쪽은 버려야 한다. 양쪽 모두를 택할 수는 없다. 세월이 흘러, 그때 택하지 않은 다른 한쪽을 택한다 해도 이미 그건 과거일 뿐이고 새로 선택한 한쪽은 전혀 다른 미래가 된다. 어느 순간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미래와 과거가 바뀌게 된다. 때론 타인이 개입해서, 자기 선택과 무관하게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운명과 인연이 겹쳐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과정, 사랑. 
가슴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이 있어도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싹트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순 없으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를 공유하기까지 운명과 인연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곁에 없습니다. 어느날 미래에서 그녀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은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있다면, 인연이 있다면 그녀를 반드시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운명이라 해도 미리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우리는 영원을 약속하게 된다.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그저 언어로만 서로를 알아왔던 두 사람은 이제 몸이 더해져 서로를 바라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두사람이 되었다. 이미 까마득히 앞서가서 거의 상대와 녹아들기 직전까지 흥분했던 자신들의 언어를 좇아가려 했지만 그 진지함과 다양한 애정의 암시에도 갑작스럽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다. 

운명을 믿고, 인연을 믿고 사랑을 약속하지만 운명과 인연 사이에 타인이 끼어든다. 심장을 도려내는 간섭. 
만약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한다면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운명과 인연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온다. 이제 이전 사랑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운명과 인연이 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운명과 인연 역시 또다시 또 다른 운명과 인연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운명과 인연은 돌고 돈다. 때문에 사랑도 돌고 돈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느끼지 못하는 공기처럼, 투명한 물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미래에서 온 사랑은 현재 사랑을 파괴한다.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랑을 지워야 한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 묻어야 한다. 과거 속에 묻은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다. 미래가 과거를 바꾼 것이다. 사랑이란 미래로 향하는 약속이다. 하여 과거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힌다. 이끌림에 이끌려 새로운 사랑이 미래에서 찾아 온다. 

“지구 어딘가에서 요코 씨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죽을 거예요.”

“요코 씨가 자살한다면 나도 할 거예요. 이건 나만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온다면 그건 나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줘요.”

이미 약혼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마키노. 
그리고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요코
요코와 약혼한 남자, 리처드.
마키노를 빼앗으려는 여자, 미타니 

“나, 이제 곧 결혼해요.”
“그러니까 내가 그걸 막으러 왔죠.”

“어렵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만나버렸잖아요? 그 사실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요. 고미네 요코라는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생이라는 건 나한테는 이미 비현실적이에요. 내가 살아 있는 이 현실에는 요코 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내 곁에 계속 존재해줬으면 좋겠어요. 날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소나기처럼 갑자기 새로운 사랑이 찾아 왔지만 그 사랑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은 감정이다. 형태가 없어서 취하기 어렵다. 그래서 말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키노 씨가 마드리드에 가 있는 동안에 그 사람하고 얘기했어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약혼을 취소해줬으면 한다고 전했죠.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고. …… 그 보고를 하고 싶었어요, 오늘.”

그녀도 사랑한다고 했다.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앞선 인연을 버리고 새로운 운명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억겁의 세월이 만든 운명, 인연인가 보다. 하지만 또 다른 운명이 둘 사이에 끼어든다. 운명의 훼방꾼.  

그런데 이 긴 침묵이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몰고 왔다. 시선을 떨군 채 침묵하던 요코가 다시 눈을 드는 것을 계기로 사나에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코 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단지 요코 씨와의 관계가 시작된 뒤로 마키노 씨는 자신의 음악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요코 씨를 속인 것은…… 요코 씨에게는 자기만의 멋진 인생이 있잖아요? 하지만 내 인생은 마키노 씨를 빼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

사랑으로 사랑을 갚았다. 사랑이 사랑을 배신했다. 요코는 과거로 돌아간다. 리처드 그리고 켄.  
정말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모든 것이 인연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요코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하지만 결국 상대를 한 번도 나무라는 일 없이 그녀는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고된 이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키노는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코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도 완벽히 규율됐던 세계와 다르게 이제는 오히려 음악 자체를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그것을 지켜보다가 중요한 지점에서 단숨에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듯한 선명한 솜씨가 있었다. 그것 또한 오랜 ‘슬럼프’ 끝에 그에게 생겨난 하나의 변화였다. 

“그럼 오늘 이 마티네의 끝에 다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요코는 그때서야 희미하게 웃음이 감돌던 뺨을 파르르 떨며 숨을 죽였다. 마키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을 위해(for you) 라는 말이 사실은 단지 '당신을 위해(for you)’ 라는 뜻이라는 것을 전하려는 듯이 슬쩍 턱을 끄덕인 다음에 의자에 앉았다. 

운명 같이 찾아 온 사랑, 그리고 운명처럼 사라진 사랑.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  
가슴 떨리는 사랑이라고 해도 잊음과 버림에 익숙한 우리가 함부로 운명이니 인연이니 말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랑이라는 떨림을, 영원이라는 약속을, 함께하자는 맹세를 포기하겠는가! 


아무리 운명이라고 해도 가슴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6월 16, 2017

병사(病死)에서 외인사(外因死)로

어제 서울대병원이 백남기 선생 사인(死因)을 병사에서 외인사로 변경, 발표했다. 오늘은 이철성 경찰청장이 직접 사과했다. 
고인은 억울하게 가셨지만 지금이라도 사인을 변경한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죽음에 다소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또한 물대포 책임자인 경찰청장의 사과 역시 이후 이 사고를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사인을 변경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이 죽은 이유도 바뀌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사과는 진정성도 중요하지만 그 타이밍 또한 매우 중요하다. 고인이 사망한 지 거의 일 년이 다 된 지금에 와서 사과를 한다는 것은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고 진정어린 사과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만약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들이 사과를 했을지 의심스럽다. 아마 절대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왜 사인을 변경, 발표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만약 의사가 사실관계를 왜곡했다면, 그것도 특정 목적을 위해 고의로 그런 일을 했다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살얼음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환자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사람 목숨을 왜곡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천벌을 받을 것이고, 온국민이 이해하지 않을 것이며 고인과 유가족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공권력은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국민을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 속에서 피치 못한 이유로 국민이 사망했다면 국가가 정중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합리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맞다. 누구를 위한 국가이고 누구를 위한 권력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종환 문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 자리에서 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알베르 카뮈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6월 13, 2017

me before you

생명은 있지만 삶은 없다. 
사지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다면, 말하고 숨 쉬는 것 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과연 그런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무슨 수로 극복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현대 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전신불수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그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힘이 될까? 윌리엄 트레이너는 그래서 죽음을 선택한다. 존엄사!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어머니.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에요. 회복될 가망은 없으니까,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끝내달라는 부탁은 철저히 합리적인란 말입니다. 

아무리 생명이 고귀하고 함부로 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생명 자체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온몸을 옥죄는 고통, 온 정신을 삼키는 좌절과 공포, 절대 끝나지 않을 시베리아 횡단철도 같은 긴 외로움. 장마로 쓰러진 볏단 같은 처절함. 겨울 산 속 짐승 같은 깊은 고독과 절망. 
스스로 생명을 포기해야만 하는 자들의 좌절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리고 이런 거 알아요? 아무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아무도 두렵다든가, 아프다든가, 무슨 멍청하고 뜬금없는 감염으로 죽게 될까봐 무섭다는 얘기는 원치 않아요…….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휠체어에 이렇게 앉아 있다보면 가끔 죽도록 답답해져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고 싶어진다는 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죽을 권리, 스스로 생명을 포기할 권리, 과연 이는 정당한 권리일까? 이를 타인이 말리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누구에게 스스로 죽을 권리가 주어지는가? 누가 이들의 죽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가?   

“…… 난 여기서 끝내야만 해요. 더는 휠체어도 싫고, 폐렴도 싫고, 타는 듯한 다리도 싫습니다. 통증이나 피로감도, 아침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잠을 깨는 것도 이젠 싫어요. 우리가 돌아가면, 난 스위스로 갈 겁니다. ……”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거미줄 같은 숨만 쉴 수 있는 몸만 가지고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삶은 내게 인생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의지하고 살까? 그 의지를 누가 받아 줄까? 며칠이나, 몇 달이나, 몇 년이나 받아 줄까?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자, 어떤 위로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타인에게는 희망을 주려고 한다. 자기 삶은 포기하면서 타인 삶은 충만하게 만들려고 한다.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관용과 여유, 이런 패러독스가 또 없다. 
윌은 간병인 루이자 클라크에게 되려 희망을 주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 자신이 다 살지 못한 인생을, 자신처럼 살지 않도록,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배려했던 루이자에게 참 인생을 살도록 오히려 희망을 준다.  

“당신한테 기회를 주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당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이제야 간신히 자기 자신의 잠재성을 깨닫기 시작한 어떤 사람. 그게 날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당신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겁니다.”

“엄마? 내가 윌한테 진 빚이 있어요. 그 빚을 갚으려면 가야만 해요. 누구 때문에 내가 대학에 지원했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내 인생에서 의미를 찾도록, 세상 밖으로 여행을 떠나도록, 야심을 갖도록 용기를 줬다고 생각하세요? 모든 걸 바라보는 내 생각을 바꿔놓은 사람이 누구 같아요? …… 다 윌 덕분이라고요. 저는 내 평생의 27년 세월보다 지난 6개월 동안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스위스에 와달라고 하면, 그래요, 난 갈 거에요. 결과가 어떻든.”

나는 맑고 파란 스위스의 하늘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두 사람, 처음엔 서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두 사람, 하지만 결국은 온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이 함께 했던 모험들, 그들이 갔던 장소들, 그리고 내가 꿈도 꾸어보지 못했지만 결국 보게 되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짜릿하게 전류가 통하는 하늘과 형광빛으로 빛나는 바다와 웃음소리와 어리석은 농담들로 가득했던 밤들을 그에게 그려주었다. 그를 위한 세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작가는 존엄사를 선택한 윌리엄 트레이너와 간병인 루이자 클라크를 통해 진솔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어떨 땐 가족보다 남이 훨씬 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마음 붙일 곳 없던 사람이 좋은 친구를 만나 드디어 모든 것을 편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송곳 하나 찌를 곳 만큼 여유도 없는 우리에게 인생을 크게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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