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운명이라고 하고 인연이라고도 한다.
운명이라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인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여 우리는 운명이나 인연이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된다. 운명과 인연이 늘 해바라기처럼 웃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반대로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이 운명과 인연을 바뀌게 하는 수레바퀴일 수도 있다. 바뀐 후나 바뀌기 전이나 모두 운명인 건 마찬가지다. 갈림길에서 한쪽을 택하는 경우 나머지 한쪽은 버려야 한다. 양쪽 모두를 택할 수는 없다. 세월이 흘러, 그때 택하지 않은 다른 한쪽을 택한다 해도 이미 그건 과거일 뿐이고 새로 선택한 한쪽은 전혀 다른 미래가 된다. 어느 순간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미래와 과거가 바뀌게 된다. 때론 타인이 개입해서, 자기 선택과 무관하게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운명과 인연이 겹쳐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과정, 사랑.
가슴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이 있어도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싹트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순 없으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를 공유하기까지 운명과 인연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곁에 없습니다. 어느날 미래에서 그녀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은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있다면, 인연이 있다면 그녀를 반드시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운명이라 해도 미리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우리는 영원을 약속하게 된다.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그저 언어로만 서로를 알아왔던 두 사람은 이제 몸이 더해져 서로를 바라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두사람이 되었다. 이미 까마득히 앞서가서 거의 상대와 녹아들기 직전까지 흥분했던 자신들의 언어를 좇아가려 했지만 그 진지함과 다양한 애정의 암시에도 갑작스럽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다.
운명을 믿고, 인연을 믿고 사랑을 약속하지만 운명과 인연 사이에 타인이 끼어든다. 심장을 도려내는 간섭.
만약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한다면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운명과 인연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온다. 이제 이전 사랑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운명과 인연이 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운명과 인연 역시 또다시 또 다른 운명과 인연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운명과 인연은 돌고 돈다. 때문에 사랑도 돌고 돈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느끼지 못하는 공기처럼, 투명한 물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미래에서 온 사랑은 현재 사랑을 파괴한다.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랑을 지워야 한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 묻어야 한다. 과거 속에 묻은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다. 미래가 과거를 바꾼 것이다. 사랑이란 미래로 향하는 약속이다. 하여 과거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힌다. 이끌림에 이끌려 새로운 사랑이 미래에서 찾아 온다.
“지구 어딘가에서 요코 씨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죽을 거예요.”
“요코 씨가 자살한다면 나도 할 거예요. 이건 나만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온다면 그건 나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줘요.”
이미 약혼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마키노.
그리고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요코
요코와 약혼한 남자, 리처드.
마키노를 빼앗으려는 여자, 미타니
“나, 이제 곧 결혼해요.”
“그러니까 내가 그걸 막으러 왔죠.”
“어렵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만나버렸잖아요? 그 사실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요. 고미네 요코라는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생이라는 건 나한테는 이미 비현실적이에요. 내가 살아 있는 이 현실에는 요코 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내 곁에 계속 존재해줬으면 좋겠어요. 날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소나기처럼 갑자기 새로운 사랑이 찾아 왔지만 그 사랑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은 감정이다. 형태가 없어서 취하기 어렵다. 그래서 말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키노 씨가 마드리드에 가 있는 동안에 그 사람하고 얘기했어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약혼을 취소해줬으면 한다고 전했죠.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고. …… 그 보고를 하고 싶었어요, 오늘.”
그녀도 사랑한다고 했다.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앞선 인연을 버리고 새로운 운명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억겁의 세월이 만든 운명, 인연인가 보다. 하지만 또 다른 운명이 둘 사이에 끼어든다. 운명의 훼방꾼.
그런데 이 긴 침묵이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몰고 왔다. 시선을 떨군 채 침묵하던 요코가 다시 눈을 드는 것을 계기로 사나에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코 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단지 요코 씨와의 관계가 시작된 뒤로 마키노 씨는 자신의 음악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요코 씨를 속인 것은…… 요코 씨에게는 자기만의 멋진 인생이 있잖아요? 하지만 내 인생은 마키노 씨를 빼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
사랑으로 사랑을 갚았다. 사랑이 사랑을 배신했다. 요코는 과거로 돌아간다. 리처드 그리고 켄.
정말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모든 것이 인연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요코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하지만 결국 상대를 한 번도 나무라는 일 없이 그녀는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고된 이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키노는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코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도 완벽히 규율됐던 세계와 다르게 이제는 오히려 음악 자체를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그것을 지켜보다가 중요한 지점에서 단숨에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듯한 선명한 솜씨가 있었다. 그것 또한 오랜 ‘슬럼프’ 끝에 그에게 생겨난 하나의 변화였다.
“그럼 오늘 이 마티네의 끝에 다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요코는 그때서야 희미하게 웃음이 감돌던 뺨을 파르르 떨며 숨을 죽였다. 마키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을 위해(for you) 라는 말이 사실은 단지 '당신을 위해(for you)’ 라는 뜻이라는 것을 전하려는 듯이 슬쩍 턱을 끄덕인 다음에 의자에 앉았다.
운명 같이 찾아 온 사랑, 그리고 운명처럼 사라진 사랑.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
가슴 떨리는 사랑이라고 해도 잊음과 버림에 익숙한 우리가 함부로 운명이니 인연이니 말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랑이라는 떨림을, 영원이라는 약속을, 함께하자는 맹세를 포기하겠는가!
아무리 운명이라고 해도 가슴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