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한 환경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바늘 하나 꽃을 만큼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단 한 사람도 얘기할 상대가 없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등졌을 때를 우리는 고독하다고 한다. 고독은 그렇게 절망적인 것이다.
왜 하필 페루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고 생각해 보니 페루만큼 어울리는 나라가 없을 듯도 하다. ‘페루’, 왠지 아득하게 느껴지고 고독이 절정에 이른 곳처럼 새겨진다. 그 먼 곳에 새들이 날아와서 줄줄이 죽어 간다. 세상의 끝, 죽음은 삶의 끝, 그래서 다시 세상의 끝, 페루!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세상 이치를 다 깨닫고 나니 공허함이 밀려든다. 사랑과 전쟁, 애정과 증오, 삶과 죽음, 어쩌면 세상은 아주 단순한 것들의 반복이다. T.S 엘리엇이 말했던가! 탄생, 섹스와 죽음이 인생의 총체라고…… 나고, 하고, 가고…… 이 한 사이클이 우리 인생이란 말인가? 덧없고 덧없어라.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여자가 여기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데, 이는 스스로에 대한 간청인지도 모르겠다. 애써 죽음을 외면하기 힘들고 이미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기억은 지문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은 건 혼자일 뿐이고…...
그녀는 그를 향해 눈을 들고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남은 눈물로 더욱 맑아진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곳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다가,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들어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리는,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아! 세상은 얼마나 고독한 곳인가?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간다. 조롱하며. 조롱하며. 조롱하며
“지옥과 저주라네. 이보게, 지옥과 저주란 말이야. 이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군. 그녀와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세. 세상엔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머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나간 것에 대한, 얼마 안 남은 것에 대한, 고독!
마지막 자존심에 대한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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