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있지만 삶은 없다.
사지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다면, 말하고 숨 쉬는 것 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과연 그런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무슨 수로 극복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현대 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전신불수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그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힘이 될까? 윌리엄 트레이너는 그래서 죽음을 선택한다. 존엄사!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어머니.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에요. 회복될 가망은 없으니까,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끝내달라는 부탁은 철저히 합리적인란 말입니다.
아무리 생명이 고귀하고 함부로 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생명 자체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온몸을 옥죄는 고통, 온 정신을 삼키는 좌절과 공포, 절대 끝나지 않을 시베리아 횡단철도 같은 긴 외로움. 장마로 쓰러진 볏단 같은 처절함. 겨울 산 속 짐승 같은 깊은 고독과 절망.
스스로 생명을 포기해야만 하는 자들의 좌절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리고 이런 거 알아요? 아무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아무도 두렵다든가, 아프다든가, 무슨 멍청하고 뜬금없는 감염으로 죽게 될까봐 무섭다는 얘기는 원치 않아요…….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휠체어에 이렇게 앉아 있다보면 가끔 죽도록 답답해져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고 싶어진다는 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죽을 권리, 스스로 생명을 포기할 권리, 과연 이는 정당한 권리일까? 이를 타인이 말리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누구에게 스스로 죽을 권리가 주어지는가? 누가 이들의 죽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가?
“…… 난 여기서 끝내야만 해요. 더는 휠체어도 싫고, 폐렴도 싫고, 타는 듯한 다리도 싫습니다. 통증이나 피로감도, 아침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잠을 깨는 것도 이젠 싫어요. 우리가 돌아가면, 난 스위스로 갈 겁니다. ……”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거미줄 같은 숨만 쉴 수 있는 몸만 가지고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삶은 내게 인생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의지하고 살까? 그 의지를 누가 받아 줄까? 며칠이나, 몇 달이나, 몇 년이나 받아 줄까?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자, 어떤 위로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타인에게는 희망을 주려고 한다. 자기 삶은 포기하면서 타인 삶은 충만하게 만들려고 한다.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관용과 여유, 이런 패러독스가 또 없다.
윌은 간병인 루이자 클라크에게 되려 희망을 주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 자신이 다 살지 못한 인생을, 자신처럼 살지 않도록,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배려했던 루이자에게 참 인생을 살도록 오히려 희망을 준다.
“당신한테 기회를 주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당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이제야 간신히 자기 자신의 잠재성을 깨닫기 시작한 어떤 사람. 그게 날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당신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겁니다.”
“엄마? 내가 윌한테 진 빚이 있어요. 그 빚을 갚으려면 가야만 해요. 누구 때문에 내가 대학에 지원했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내 인생에서 의미를 찾도록, 세상 밖으로 여행을 떠나도록, 야심을 갖도록 용기를 줬다고 생각하세요? 모든 걸 바라보는 내 생각을 바꿔놓은 사람이 누구 같아요? …… 다 윌 덕분이라고요. 저는 내 평생의 27년 세월보다 지난 6개월 동안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스위스에 와달라고 하면, 그래요, 난 갈 거에요. 결과가 어떻든.”
나는 맑고 파란 스위스의 하늘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두 사람, 처음엔 서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두 사람, 하지만 결국은 온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이 함께 했던 모험들, 그들이 갔던 장소들, 그리고 내가 꿈도 꾸어보지 못했지만 결국 보게 되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짜릿하게 전류가 통하는 하늘과 형광빛으로 빛나는 바다와 웃음소리와 어리석은 농담들로 가득했던 밤들을 그에게 그려주었다. 그를 위한 세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작가는 존엄사를 선택한 윌리엄 트레이너와 간병인 루이자 클라크를 통해 진솔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어떨 땐 가족보다 남이 훨씬 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마음 붙일 곳 없던 사람이 좋은 친구를 만나 드디어 모든 것을 편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송곳 하나 찌를 곳 만큼 여유도 없는 우리에게 인생을 크게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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