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02, 2017

덧없음에 대하여

살다 보면 그렇게 될 리 없는 일이, 아직 때가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어제 새벽, 자다가 깨서 시간을 보려고 스마트폰 홈 버튼을 눌렀더니 부재 중 전화 한 통이, 카톡 메시지 두 개가 와 있었다. 새벽이고 잠결이라 화장실만 갔다 온 후 자려고 했는데 부재 중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 잘 때는 스마트폰을 무음 상태로 해 두기 때문에 전화가 와도 알 수가 없다. 급한 일인지도 몰라 확인해 보니 사무실 동료가 한 전화였고 그가 보낸 카톡 메시지였다. 당황스럽게도 지인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예순도 안 됐고 평소 질병으로 고생한 적도 없는데 불과 몇 시간 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술 마시고 장난친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불안한 마음에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 7시가 되었고 그 동료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장난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대는 바람에 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급하게 샤워를 하고 검은 바지 검은 셔츠를 입고 출근했다. 사무실 옆 맥도날드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전 9시경에 공식적인 부고 문자를 받았다. 그제서야 그분이 사망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 빈소에 갔더니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 쓸쓸함을 형언하기 어려웠다. 문상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고 간밤 늦은 시간 날짜가 바뀌는 무렵에 사망했기 때문에 저녁 늦게나 다음날 손님이 많을 터였다. 
고인에게 헌화한 후 절을 하는데 아까는 보지 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영정 아래 국화꽃 옆에 놓여 있었다. 고인은 생전에 커피를 좋아하셨는데 가시는 길에 한잔 드시라고 놓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복받치는 눈물을 참고 있던 터에 커피를 보니 그게 뭐라고, 이제 마실 수 없다는 생각에 고인에게 절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상주들과 맞절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일어나 상주들을 위로하면서 계속 눈물을 쏟았다. 상주들은 예상치 못한 이른 사망 때문에 울었고, 사망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 서러워서 울었고 문상객이 우니 또 따라 울었다. 문상객은 허망해서 울었고, 죽음이 실감 나서 울었고, 상주들을 보니 안쓰러워서 또 울었다.
사람이 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도 추스리지 못한 채 떠나는 사람, 떠나 보내는 사람 가슴은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죽음, 남은 사람이 이토록 애달프고 서러운데 정작 고인은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아무것도 없이 먼 길을 가는 사람, 그 고독을 누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가시는 길에 국화꽃 한두 송이가 무슨 위로가 될 것인가? 커피 한 잔이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국화꽃은, 커피는 고인을 위로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주를 위로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문상객을 위로하는 것인가? 검은 바지, 검은 셔츠, 검은 넥타이, 검은 커피 속에 오롯이 국화꽃만 흰색이었다. 

여느 빈소 영정처럼 고인 역시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고인은 따뜻한 분이었다. 한 번도 화내는 것을 본 적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들은 적 없다. 어쩌면 그런 성정 때문에 화를 삭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쌓아 두었던 것이 심근경색이라는 저승사자를 통해 터진 모양이다. 술 한잔도 못 하시는 분이었고 오직 일뿐인 분이었다. 그러니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쌓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늘 웃는 모습이었고 고혈압 외에 병환이 깊었던 것도 아니라서 사망은 말 그대로 벼락 같은 일이었다. 

덧없다는 말은 곧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의미지만 덧없다는 말 자체가 덧없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지인이 사망했을 때…..등 무언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 때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아주 모자라거나, 갑자기 흘러 버렸을 때도 덧없다고 한다. 우리는 삶이 덧없음을 알게 될 때야 그 소중함도 알게 된다. 애석하게도 미리 알지 못한다. 이 얼마나 덧없는 짓인가? 덧없음을 미리 알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다가 덧없음이 앞에 닥쳐야 겨우 덧없다는 말을 할 뿐이다. 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덧없음을 미리 안다면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것이다. 싫은 사람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거나 싫지만 할 수 없이 만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덧없음이 덧없는 이유는 실재하는 자신이 아닌 남이 원하는 자신으로 살기 때문이다. 자기 부정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실컷 마음대로 산 후에 닥치는 덧없음과 참고 또 참다가 닥친 덧없음은 차원이 다를 터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늘 변하기 마련이다. 누구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인은 변하고 또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뜻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오늘 잘 살아도 내일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덧없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오고 만다. 우리 몸은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체부처럼 정확하게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 온다.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존중하며 살아야 할 터이다. 덧없음은 곧 안주하는 마음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시에 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실은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하여 덧없음이란 말은 참 덧없는 것이다. 
시간은 항상 존재하지만 똑같은 시간이 아니다. 오늘 12시가 내일 12시와 다르다. 오늘 만난 그 사람은 어제 만난 그 사람과 다르다. 오늘 뜬 태양이 내일 뜰 태양과 절대 같지 않다. 

고인은 내일 화장된다고 한다. 뜨거운 불 속에서 한줌 재로 변한 후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떠날 터이다. 無, 하지만 그 재가 다시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서 또 어떤 생명체로 태어날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너무 덧없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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