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영혼을 가진 사람, 납덩이처럼 무거운 슬픔을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둔 사람. 죽음, 이별, 질병, 고독, 전쟁 같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픔은 가슴속 깊이 떠있다가 뼈를 저미는 고독과 함께 거북 목처럼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이소베는 아내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댔다. 숨이 끊어질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띄엄띄엄 뭔가 말하고 있다.“나…… 반드시……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찾아요…… 날 찾아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구원을 바라고 환생을 바라고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
고독은 때론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도 한다.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한다.
절망이라는 늪은 모든 것을 빨이들이지만 영혼을 구원할 희망을 찾아야 한다.
밤이 깊도록 작업을 계속하는 누마다와 이를 응시하는 코뿔소새와의 영혼의 교류를 아내가 이해할 리 없었다. 누마다는 어떤 부부건 간에, 서로 용해될 수 없는 고독이 있음을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알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고독과 이 새의 고독은 밤의 정적 속에서 서로 통한다.
누마다는 아내한테 미안했다. 소년 때부터 누마다는 늘 인간이 아닌 개나 새한테 마음의 비밀을 털어놓곤 했다. 이번 경우에도, 거듭되는 수술의 실패로 우울해진 기분을 그 코뿔소새 같은 새한테 고백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내는 어느 틈엔가 꿰뚫어 보았다.
질병은 사람을 피폐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든다. 똥, 오줌 가리는 것도 사치스럽게 만든다.
전쟁은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간다.
죽음은 때로 희망이고 휴식이다. 환생을 믿는다면 죽음은 또 다른 기회임이 분명하다.
두어 달 전에 인도 북쪽 카무로지 마을에서 일본인으로 전생을 살았다는 소녀의 이야기가 보고되었습니다. 다만 그녀가 오빠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이 네 살 때여서, 저희가 전생 기억자의 조건에 넣은 세 살까지의 나이를 넘긴 탓에 조사대상에서 제외했으나, 만일을 고려해 당신의 요청대로 연락드립니다. 그녀의 이름은 라지니 푸니랄, 그녀의 생가가 있는 카무로지 마을은 갠지스 강변 바라나시 근처에 있으며……”
왔다가 가는 것은 신이 준 당연한 이치지만 삶과 인생을 공유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다. 죽음이 안타까운 건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흔적은 지워지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더 크게 갑자기 소나기가 오듯 나타난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간절함을 배운다. 비록 때가 늦었더라도.
바람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과거에 대한 회상. 회상은 늘 아쉬움을 남기고 후회를 그려낸다. 미련이 남은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무엇을 바꿀 것인가!
시간은 이미 흘러서 되돌릴 수 없는데 가슴은 허위허위 공허하다.
정신적 구원!
간절함이 하늘에 닿으면 뜻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갠지스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 침묵의 비(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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