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발칙한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 소설은 비교적 읽기 무난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를 먹고,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크게 보면, 삶과 죽음 두 가지뿐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주제만 남는다.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무한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삶에 대한 애착은 커진다. 병이 생기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그 애착은 더욱 커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느끼지 못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 하루가 그 하루일 뿐이다. 비로소 끝이 보이기 시작할 때 이기적인 애착이 가슴속에 돋는다.
“클래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 없지는 않다, 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틀림없이.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아무리 삶에 대한 애착이 크다고 해도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길 없다. 하여 좌절하게 되고 머지않아 포기하게 되며 결국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자연사든, 병사든, 사고사든 그날은 꼭 오고야 만다. 산다는 것은 곧 죽음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이다.
죽음은 곧 무(無)를 의미하는 것이다. 딱 한 번 유(有)가 있고 영원한 무(無)가 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죽음을 준비하고 살지 않기 때문인지 애절함이 없다. 삶이 곧 끝난다고 생각하면 세상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어떤 것도 의미 있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토록 소중한 하루하루를 우리는 얼마나 헛되이 보내고 있는지.
“죽음을 마주하면서 좋았던 점이라면 매일매일 살아 있다고 실감하면서 살게 된 거야.”
“아니, 우연이 아냐. 우리는 모드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너와 내가 같은 반인 것도, 그날 병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야. 그렇다고 운명 같은 것도 아니야. 네가 여태껏 해온 선택과 내가 여태껏 해온 선택이 우리를 만나게 했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난 거야.”
삶이 끝나가는 시점에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로 가득찰 것이다. 자신 인생에 대한 책임, 주변 사람에 대한 책임.
타인과 어울리는 삶, 나 혼자가 아닌, 주변인과 어울리는 삶. 그들이 있어 내 삶은 작은 역사가 된다.
그녀는 타인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온 인간이다. 표정이나 인간성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에 반해 나는 가족 이외의 모든 인간관계를 머릿속의 상상으로만 완결시켜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모두 나만의 상상이고, 내게 위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타인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포기한 채 살아왔다. 그녀와는 정반대로,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으로 괜찮으냐고 굳이 묻는다면 좀 난처하긴 하지만.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 텐데 나는 분명코 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했고, 그 끝에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이전과는 달라진 나로서 이곳에 존재한다…….어느 누구도, 나조차도, 사실은 풀입 배 따위가 아니다. 휩쓸려가는 것도 휩쓸려가지 않는 것도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한다.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그녀였다.
혼자가 아닌 삶,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 내 의지로 사는 삶. 꽃처럼 슬프지만 영원을 향해 스러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따뜻한 끈, 인연.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죽더라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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