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 2017

니체

꽃이라는 결실을 위해서는 어려움이라는 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비록 그 어려움이라는 것이 언제나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니체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고 요구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알찬 결실을 남긴 사람들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에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폭력. 이런 것들이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이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다.’

~ <<즐거운 학문>>

세상 일이 쉽게 되는 경우는 없다. 욕심이 큰 만큼 따르는 고통도 큰 법이다. 우리가 고통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가 낳은 욕심일 따름이다. 그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욕심을 쟁취하기 위해 고통을 즐기고 이겨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성과가, 그것이 무엇이든, 타인 성과 대비 떨어진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과를 내기 위한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몰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재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라. 모든 분야에서 그다지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으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그들은 부족한 자질을 일궈가면서 스스로 위대함을 획득하여 <천재>가 되었다. 그들 모두는 장인(匠人)의 근면함과 치열함을 갖추고 있어서 감히 훌륭한 완성품을 내놓기 전에 각 부분을 정확하게 구축하려고 애쓴다. 그들이 그런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황홀한 완성품이 주는 효과보다, 보잘것없고 신통치 않은 것을 더 훌륭하게 개선하는 작업 그 자체에 보다 많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지만, 니체가 한 말이라서 그런지 더 명언처럼 느껴진다. 물론 타고난 재능으로 인해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더 쉽게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누구와 비교해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한 사람만을 가지고 판단할 때, 내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려움과 고통을  치열하게 극복하려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감나무 아래 누워 입 벌리고 있으면 감이 떨어질 리 없고, 설사 떨어진다 해도 내 입 속으로 정확히 떨어질 리 없다. 목표가 있다면 반드시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장애물이 생긴다. 이때 장애물은 뿌리요, 목표가 꽃이다. 하여 뿌리 없는 꽃은 있을 수 없다.  
꽃을 가지고 싶다면 반드시 뿌리를 돌봐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정원사처럼 자신의 심리적 동인(動因)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분노와 동정, 호기심, 허무감이라는 어린 싹을 생산적으로 유익하게 잘 경작해서 과일을 맺는 아름다운 나무로 키워 울타리로 삼을 수 있다.’

~<<서광>>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어려움이라는 싹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고통없이 이루어진 결과물은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좋은 대학교에 들어간 학생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공부에 쏟은 시간과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 예를 들 것도 없이, 스스로를 돌아 보더라도 어려움없이 이루어낸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고통과 어려움은 그냥 자연스러운 삶의 조건인 것이다. 

‘미움과 시기, 탐욕, 그리고 지배욕이라는 감정은 삶의 지배적인 감정인데…… 이런 것은 삶이라는 총체적인 경제에서는 기본이며 필수다.’

~<<선악을 넘어서>>

니체는 술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니체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콜 음료는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고 했다. 
평생을 가난하고 갖은 질병을 가지고 살았던 니체가 술을 안 마셨다는 것은 놀랍다. 술이 주는 기쁨도 분명히 있을 텐데…… 만약 니체가 요즘처럼 화려한 시대에 살았더라도 술을 안 마셨을지, 안 마실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니체는 술이 주는 쾌락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여 스스로 세운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 듯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목표를 설정한다면 그에 따르는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할 방안도 반드시 함께 설계해야 한다. 목표만 설계한다면 반쪽 설계요,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할 방안도 함께 설계해야 비로소 온전한 설계가 되는 것이다.  

인생에 로또와 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불행히도 늘, 대부분 로또와는 전혀 다른 것만 있기 때문이다.  

5월 23, 2017

정도전

1398년(태조 7년) 8월 26일, 정도전이 죽었다.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게 정도전이 죽임을 당했다.

조존(操存), 성찰(省察) 두 가지에 공력을 다 기울여서책에 담긴 성현의 참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소삼십 년 긴 세월 온갖 고난 다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功業)송현 정자에서 한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 삼봉집

훗날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올려 충신으로 복권했으나,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하고 자신을 왕자가 되게 해준 정도전을 만고역적으로 기록했다.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고려를 배신하지 않아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몽주는 충신이요, 조선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고려를 배신한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렸으니 이토록 인생무상이 또 있을까. 
정도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복권되었다. 

조선에서 도덕정치, 의리정치를 이룩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정도전의 꿈이었다. 
1375년(우왕 1년)에 정도전은 귀양을 떠나 나주에서 약 10여 년을 살게 된다. 거기서 그는 민초들과 함께 살면서 민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야심을 그리게 된다. 
정도전의 민본정치는 그가 1394년에 완성한 <조선경국전>에 잘 나타나 있다. 

인군(仁君)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일 천하 만민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긴다. 민(民)은 지극히 약한 존재이지만 폭력으로 협박해서는 안 된다. 민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이지만 꾀로써 속여서는 안 된다.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민이 인군에게 복종하고 인군을 버리는 데는 털끝만큼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사심을 품고서 구차하게 해서도 안 되고 도를 어기어 명예를 구해서도 안 된다. 그 얻는 방법은 역시 인(仁)으로써만 해야 한다.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씨를 자기의 마음씨로 가지고 차마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음씨로써 정치를 해야 한다. 

조선 창업 11일 후 포고문이 발표되었는데, <태조실록>에 의하면 작성자는 정도전이었다. 민본주의 대원칙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늘이 백성을 내면서 통치자를 세우는 것은 백성이 잘 살도록 보살펴주고 편안하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도리를 잘하고 못하는 데 따라 인심이 따르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의사가 가고 오고 하는 것도 다 여기에 달렸다. 이것이 정상적인 이치인 것이다. 

민본(民本), 국민이 주인이다. 정도전이 꿈꾼 조선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600년 전 정도전의 사상을 오늘 그대로 가져온다 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을 것이다. 국민 아래 있는 대통령, 국민을 우러러 보는 대통령,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는 대통령
대통령은 국민의 어버이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위임 받은 권력을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뿐이다. 그 권력으로 국민을 억누를 수 없고, 그 권력으로 국민을 아프게 할 수 없으며, 그 권력으로 국민을 짓밟을 수 없는 것이다. 
통치는 거룩한 것이지만 만인을 위해 낮은 자리에서 행해야 한다. 그것이 민본이다. 

대통령은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절대 군주가 아니다. 신은 더욱 아니다. 그저 국민의 심부름꾼일 뿐이다. 
국민없이 대통령이 있으랴! 국민은 대통령의 어버이이며 존재 이유다. 그런 국민을 부리려하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할 일이다. 

시대를 앞선다는 것이 이렇듯 힘든 것인가 보다. 정도전이 그랬고 노무현이 그랬다.
오늘 그분이 가신 지 어언 8년이 되는 날!

세월의 무심함을 다시 한 번 느끼며...... 

5월 17, 2017

아몬드, 평범함에 대하여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불행이 닥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프기 전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사고가 나기 전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죄 짓기 전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만약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과 다르게 태어났다면 그저 다른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바랄 것이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은 평범한 삶인 것이다. 특별하지 않았던 예전 시간으로 되돌리길 바랄 것이다. 
평범한 것이 가장 특별하다는 것을 평범함을 잃어봐야 알 수 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이길 바란다. 우리 자식이 남보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란다. 의사가 되길 바라고, 판검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식이 아프거나 큰 사고를 당하거나 혹여 사망하게 되는 불행이 닥친다면, 그 모든 특별한 바람은 사라지고 원래 모습, 평범했던 모습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평범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매우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남보다 앞서지 않고 남보다 잘나지 않고 남보다 덜 배웠어도 오늘 이 모습이 지속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낄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바로 불행해지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만약 우리에게 감정이 없다면, 마치 로봇처럼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까? 그때 우리는 사람일까?

‘알렉시티미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병. 
우리 뇌 속에 편도체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사유로 이 녀석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면 우리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마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없이 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길 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기쁜 일에 기쁨을 드러내지 않으면 우리는 보통 겸손하다거나, 아주 차분하다고 말한다.
슬픈 일에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면 우리는 대개 얼마나 슬프면 저토록 참을 수 있을까, 또는 냉정한 사람이군, 라고 말한다.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전혀 공포스럽지 않게 행동한다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관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나, 내 가족, 내 주변 친구라면…… 
결국 우리는 평범해지는 것을 바라게 된다. 보통 인간처럼 감정만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빌게 된다.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고……   
우리가 사람인 이유는 웃고, 울고, 저항하고 피할 줄 아는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삶이란 그렇게 평범한 것이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거짓말처럼 엄마가 깨어났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엄마가 해낸 거다. 그런데 엄마는 다르게 말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내가 해냈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를 더 설명하고 싶은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갑자기 뺨이 뜨겁다. 엄마가 뭔가를 닦아 준다. 눈물이다.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내가 운다. 그런데 또 웃는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5월 12, 2017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2


도스가 톨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소주나 한잔하자고 했는데 톨스가 마침 자기도 심심하던 차였으니 이따 저녁 때 보자고 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톨스가 인사동에 괜찮은 주점이 있으니 거기서 보자고 했고 도스는 자기도 들어본 집이라고 하며 그러자고 했다. 

톨스가 인사동 골목에 있는, 지붕이 파란 <그네주점>으로 들어갔는데 익숙한 주점이 아니었다. 앞마당에 있던 그네는 없어졌고 사장도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톨스가 의아해하면서 사장을 찾았다. 잠시 뒤 안경을 낀 잘생긴 사장이 나오더니 어서 오시라고 허리를 깊숙히 숙여 인사했다. 톨스가 주점이 바뀐 것이냐고 묻자 새로운 사장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밖으로 나가서 다시 보니 <더불어주점>이라는 간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장이 하는 말이 그전 사장은 관둔 지 두어 달 지났고 자기가 가게를 어렵사리 인수해서 며칠 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톨스가 마당에 있던 그네는 어디 갔냐고 당황해하면서 물었더니 손님들이 하도 싫어해서 잘라버렸다고 사장이 예의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톨스가 손님들이 왜 그네를 싫어했냐고 다시 물으니까, 그네라는 것이 손님을 태워서 즐겁게 해줘야 하는 것인데 허구한 날 고장이 나서 그네 본연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고, 몇 년 전에는 그네를 타던 몇 명이 그만 그네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는데 이전 사장은 사고 현장에 즉각 나타나지도 않았고 무려 일곱 시간이나 지난 후에 부시시한 얼굴을 내밀더니 엉뚱한 소리나 해대며 희생자 가족을 욕보였던 일이 있었다고 새로운 사장이 침착하게 답변했다. 사장은 또 그네가 원래 불량품이었던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톨스는 대단히 아쉬워하며 오른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잠시 뒤 도스가 도착했고 둘은 주점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톨스가 "이 주점 사장은 계약기간이 아직 일 년 정도 남았는데 바뀌었다네.” 하니까, 도스가 며칠 전 뉴스에서 봐서 자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바뀌기 전에 사장 물러나라고 온동네 사람들이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모여서 시위를 했었다고 하며 이제야 속시원하다고 덧붙였다.

메뉴판을 훑어보다가 주문을 막 하려던 차에 노란 머리를 한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그가 자기는 세계 각국 여러 주점에 주류와 안주를 납품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새로 유통하는 막걸리가 있는데 한번 드셔보시라고 권했다. 두 병 주문하면 한 병을 공짜로 준다는 것이었다. 톨스가 좋다고 했더니 그 남자가 얼른 막걸리 세 병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도스가 그 남자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노란 머리 남자가 자기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라고 대답했다. 어느 나라 분이냐고 또 물어보니 이름에서 오리 냄새가 나는 도널드 트럼프가 자기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 사람이라고 떵떵거리며 말했다. 또 그는 북한과 중국에 주류와 참외를 독점 공급하기 위해 얼마 전에 성주에서 10억 달러짜리 계약을 맺었다고 하며 계약 과정에서 엄청 고생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친구가 된 기념으로 오늘 마시는 막걸리를 전부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어찌나 건방지게 말하던지 도스는 짜증이 났지만 초면이라 참기로 했다.  

트럼프가 자기는 세계 여러 주점을 다녀봤는데 여기 <더불어주점> 사장님은 참 잘생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저번 여자 사장은 약간 이상해서 자기 회사가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었는데 이번 사장은 이문은커녕 손해만 볼 것 같다고 말하며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 본사에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도스가 트럼프에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 때문에 앞으로 참외도 마음놓고 못 먹게 생겼다고 말했더니 트럼프가 걱정할 것 없다고 큰소리치며, 자기가 앞으로 원하시면 언제든지 참외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톨스는 그깟 참외좀 안 먹으면 어떠냐고 도스를 구박하듯 말했고 도스는 공짜 참외는 필요 없다며 대단히 도덕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말했다. 

톨스가 새로운 사장을 불러 막걸리 한 잔을 권하고 나서는, 어쨋든 주점 사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어 저기 옆에 계시는 젊은 남자는 누구냐고 물었는데 사장이 자기 일을 보좌하는 지배인인데 아주 매실매실한 사람이라고 공손하게 답변했다. 이에 톨스가 아니 저 사람은 예전에 데모 엄청했던 그 사람 아니냐고, 어떻게 저런 사람을 지배인으로 채용했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도스가 톨스에게 좀 조용히 하라고 하며, 저분은 자기도 잘 아는데 젊고 유능하며 애사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또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이유는 저 젊은 지배인이 예전에 구속과 억압에 항거하는 데모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자유가 생긴 것이라며 합리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옆에 있던 이름에서 오리 냄새나는 도널드 트럼프가 트림을 길게 하더니, 자기가 막걸리는 처음 마셔보는데 참 맛있는 술이라고 선언하더니, 서로 트집을 잡는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흥겹게 마셔보자고 했다. 셋은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막걸리를 가득 채운 후 건배를 했다. 건배를 너무 세게한 나머지 그만 트럼프가 술잔을 놓치고 말았고 하필 톨스 무릎으로 떨어져버렸다. 바지가 다 젖어버렸는데도 톨스는 끽소리 못하고 오히려 트럼프 눈치만 보고 있었고 트럼프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도스가 이를 이상히 여겨 나중에 화장실에서 물었더니 트럼프가 성주에서 참외 독점 계약을 체결할 때 연설문을 써주는 등 자기가 몇몇 도움을 줬고 그 대가로 뒷돈을 좀 받았노라고 술김에 고백했다. 도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껄껄차며 벌 받는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더 심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막걸리가 서너 순배 돌자 셋은 어느덧 정신이 자몽했다. 아슴아슴한 정신으로 트럼프가 화장실좀 다녀오겠노라고 하며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그 틈에 도스가 오리새끼 같은 도널드 트럼프를 씹기 시작했다. "아니 참외 농사를 하려면 자기네 나라에서 하던지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세상 시끄럽게 하는지 모르겠네” 라고 하니까 듣다 못한 톨스가 트럼프를 욕되게 하면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또 자기가 받은 리베이트가 꽤 되니 장차 술을 많이 사겠다고 은근슬쩍 회유를 하기도 했다. 

이때 옆 테이블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빨간색 점퍼, 녹색 점퍼, 하늘색 점퍼, 노란색 점퍼를 입은 네 사람이 격하게  뭔가 토론을 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자기들도 이 주점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저 사장때문에 다 망쳤다고 하는 것이었다. 

빨간 점퍼를 입은 남자가 "저 새 사장은 종북좌파인데 장차 이 주점 앞날이 걱정된다.” 라고 했다.
녹색 점퍼를 입은 남자는  "제가 바로 찰습니닼, 이 가게를 인수할 사람이 누굽니꽠", 하며 괴상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국민의주점>이란 간판을 달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속상해했다. 
하늘색 점퍼를 입은 남자는 자기가 가장 바른 사람이라고 하며 주점 인수를 못해 아쉽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계약한 성주 참외 독점권을 적극 지지한다.” 라고 엉뚱한 말을 했다. 
노란 점퍼를 입은 사람은 유일하게 여자였는데 "손님들이 당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가게를 만들고 싶었는데 아쉽다.” 라고 말하더니 사실 자기도 이 주점을 인수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도스가 그들에게 공정한 경쟁에서 졌다면 패배를 받아들이고 축하해 주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이미 주점 사장은 결정됐는데 뭘 그리 시끄럽게 떠드냐고 하며 끼어들었다. 이때 빨간 점퍼가 탁자를 탁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그런 말을 할 것 같으면 낙동강에 가서 빠져 죽으라고 소리쳤다. 이에 도스가 자기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와서 낙동강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초면에 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하니까, 빨간 점퍼가 "이런 정신나간 러시아 영감탱이 같으니” 라고 말했다. 도스가 다시 예전에 뇌물 받은 건으로 재판 중인 것으로 아는데 꼭 유죄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빨간 점퍼가 마치 돼지발정제를 먹은 것처럼 흥분하며 쌍소리를 계속했다. 
주점이 너무 소란스럽자 녹색 점퍼가 “왜들 이러십니꽈앜, 조용히좀 하십시요옼,” 하면서 끼어 들었다. 도스가 “목소리가 원래 그렇습니꽈앜?”라고 걱정스럽게 물었더니, 녹색 점퍼는 자기는 원래 의사 출신이라며 그런 건 걱정할 것 없다고 꽥꽥거렸다. 
그때 어디서 “아빠”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엄청나게 이쁘게 생긴 아가씨가 하늘색 점퍼에게로 오는 것이었다. 하늘색 점퍼는 자기 딸 유담이라고 좌중에게 소개하며 자랑스럽다는 듯 딸을 껴안았고 곧 둘은 먼저 주점을 나갔다. 톨스는 자기가 아는 유담은 매우 뚱뚱한 남잔데 이상하다며 갸우뚱했다. 

도스와 톨스도 이만 주점에서 나가려고 하자 트럼프가 둘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다음에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에 오시면 자기가 잘 모시겠다고 하며 명함을 건넸다. 이어 그들은 <더불어주점> 사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앞으로는 사장인 자신이 손님들과 직접 소통하며 새로운 주점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고 다른 주점 손님도 자기 손님처럼 모시겠다고 하며 문 밖까지 따라나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했다. 도스는 새 사장이 참 친절하다고 생각했고 톨스 역시 일단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더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 주점 안에서 “사장님 여기 계산요옼, 얼맘니까앜”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예의 녹색 점퍼 목소리였다. 

밖에는 대기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톨스가 놀라자, 도스가 저 사장님은 원래 4년 전에 이 가게를 인수하려다 실패했었고 이번에 다시 도전해서 마침내 주점을 인수했다고 말하며, 진정 손님을 섬길 줄 아는 마음이 아주 호박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톨스는 자기는 지난번 사장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하며 도스가 하는 말이 자기에겐 오이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살짝 흥분한 도스가 톨스에게 세상 일을 좀 제대로 보고 고추하라고 말하면서 얼른 2차나 가자고 했다. 

to be continued

5월 10, 2017

세네카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는 자기 제자인 폭군 네로 황제로부터 자결을 명령 받고 죽었다. 동료들이 죽음을 앞둔 세네카 앞에서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자 그가 말했다. 
“그대들 철학은 다 어디로 갔는가? 눈앞에 닥치는 불행에 맞서겠다던 그 결심은, 그렇게 오랜 세월 서로 격려해온 그 결심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네로가 잔혹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은 아무도 없거늘! 자기 어머니와 형제를 죽인 마당에 자기 선생과 가정교사를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네."


세네카는 정맥을 끊었지만 나이가 든 탓인지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아 첫 번째 자결에 실패했다. 그는 과거 460년 전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은 것을 기억하며, 본인이 존경하는 철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죽고자 독약을 마시지만 이 또한 효과가 없었다. 결국 뜨거운 증기탕 안에서 서서히 질식해 죽는 방식을 택했고 세 번째 시도만에 그렇게 사망했다. 

철학자 세네카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수긍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불행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강조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내 삶을 철학 덕택으로 돌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철학에 대한 나의 의무다."

어쩌면 세네카는 좌절과 불행을 가장 많이 겪은 철학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결핵으로 6년을 고생했고, 아무 잘못없이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으며,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의 명령에 따라 자결 시도 세 번만에 죽었다. 지진 같은 자연재해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그 모든 고통 앞에서 평정을 잃지 않았다. 

분노, 충격, 불공평, 근심, 조롱 같은 좌절을 수긍하는 것이 유일한 극복 방법이라고 세네카는 가르친다. 언뜻 체념하라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관계를 정확히 아는 것만이 좌절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모두는 사건,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불행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다만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닥친 불행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좌절과 불행은 대부분 갑자기 오는데, 미리 예측할 수 없으니 언제라도 자신에게 불상사가 생길 수 있음을 인지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 불가능한 좌절이 찾아온다면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맞서서 될 일인지, 안 될 일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고통은 몇 배로 커질 것이다. 

불행은 전부 남의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좌절과 불행이 닥쳤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 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5월 09, 2017

새로운 대통령 문재인을 맞으며

지난 9년은 너무 길었다. 그 전 10년은 너무 짧았고 앞으로 5년 또한 아주 짧을 것이다.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국민 뜻을 받들고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들이 대통령이 됐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들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국민으로부터 5년 동안 위임 받은 권력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며, 국민을 위하지 않고 특정 몇 명을 위하며, 반대하는 집단에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선동하는 자들은 다시는 대통령이 되서는 안 된다. 
국민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법을 무시하는 집단은 전부 몰아내야 한다. 

욕 먹을 각오로 한 마디 하자면, 60대 이상에게는 투표권을 줘서는 안 된다. 
이유는 명확하다. 노인 폄하, 노인 무시의 문제가 아니라, 살 날이 많은 젊은이의 선택이 더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60대 이상도 한때는 60대 미만이었고 60대 미만도 머지않아 60대 이상이 될 것이다. 60대 이상에게 투표권을 안 준다고 해도 어차피 모든 이에게 공평한 일이 된다. 다만 60대 이상은 사회 원로로서 존경 받고 대접 받아야 하며 그들을 위한 복지정책이 상당 수준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더불어 그들의 지혜를 국가 운영에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국가를 사회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 국가는 너무 늙었다. 사회라는 곳은 마치 전쟁터와 같아서 40대만 넘어도 마땅히 설 자리가 없는데, 국가는 60대 이상 원로들 의견이 상당히 반영된다. 이로 인해 변화와 개혁은 더딜 수밖에 없다. 만약 국가가 어떤 회사라고 한다면 60대 이상이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살아 남았다 한들 그들 의견이 제대로 반영이 되겠는가?
새로운 관점, 지식, 정보, 변화 가능성,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는 젊은층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몇 시간 후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맞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문재인을 지지하지만 내일부터는 철저히 그를 감시할 것이다. 이제는 지지자가 아닌, 비판자 입장에 설 것이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다. 천안함, 4대강, BBK, 18대 대선 부정 건, 최순실 게이트, 사드 등 지난 9년간 있었던 부정비리를 모조리 조사해서 부정한 것이 있거나 국민을 속인 것이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 보복이 아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죽음과 관련된, 분명 새로운 사실이 나올 것이라 믿고 싶다.  

숫자로 본 조선(朝鮮) 왕(王)

5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진 조선에는 왕이 27명 있었다. 

종(宗) : 18명
조(祖) : 7명
군(君) : 2명 

1. 평균 수명 : 약 46년
장수한 왕 : 영조 82세 --> 태조 73세 --> 고종 67세 --> 광해군 66세
단명한 왕 : 단종 16세 --> 예종 19세 --> 헌종 22세 --> 인종 30세

종(宗) 평균 : 약 41년
조(祖) 평균 : 약 58년
군(君) 평균 : 약 48년

종(宗)은 장차 왕이 될 것을 미리 알았고, 세손, 세자를 거쳐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강한 제왕 수업, 스트레스, 격무 등으로 시달렸을 것이다. 하여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았던 것 같다. 
종(宗)과 달리 조(祖)는 대부분 갑자기 왕이 된 경우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을 것이고, 하여 스트레스가 훨씬 적었을 것이다. 
군(君)은 종(宗)이 될 운명이었으나 재위 중 탄핵을 당했기 때문에 종(宗)보다는 길게, 조(祖)보다는 짧게 살았던 것 같다. 다만 표본이 두 명에 불과해서 숫자가 큰 의미가 없다. 

2. 평균 재위 기간 : 약 19년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 : 영조 51년 7개월 --> 숙종 45년 10개월 --> 고종 43년 7개월 --> 선조 40년 7개월
재위 기간이 짧았던 왕 : 인종 9개월 --> 예종 1년 2개월 --> 정종 2년 2개월 --> 문종 2년 3개월

종(宗) 평균  : 약 16년
조(祖) 평균  : 약 28년   
군(君) 평균  : 약 13년 

종(宗) 재위 기간은 정종, 문종, 단종, 예종, 인종, 경종, 순종 등이 평균을 다 깎아 먹었다. 이들 일곱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약 2년에 불과하다. 
태조 6년을 제외하고, 조(祖) 6명은 모두 10년 이상 재위했다. 조선 최악의 왕으로 평가 받는 선조가 무려 40년간 왕좌에 있었고, 조선 후기 부흥을 이끌었던 영조는 51년 동안 왕이었다.

3. 재위 시작 나이
늦은 나이에 재위한 왕 : 태조 57세 —> 정종 41세 —> 세조 38세 —> 광해군, 순종 33세
이른 나이에 재위한 왕 : 헌종 7세 —> 순조 10세 —> 단종 11세 —> 성종 12세 

종(宗) 평균 : 약 22세 
조(祖) 평균 : 약 29세  
군(君) 평균 : 약 26세 

조(祖)는 종(宗)보다 7살 더 많은 시점에 왕이 되었다. 왕권 강화에 7살이란 시간은 아주 중요한 이점이었을 것이다. 예외적으로 순조와 성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오랜 기간 재위했다.  
정종은 태조가 늦은 나이에 왕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본인도 늦은 나이에 왕이 됐으며, 형의 아들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 역시 늦은 나이에 왕이 되었다. 

4. 평균 부인 수(정비와 후궁 포함) : 4.4명, 27명 왕의 총 부인 수는 119명
부인이 많았던 왕 : 태종 12명, 성종 12명 --> 중종 10명 --> 정종 8명, 선조 8명, 철종 8명
부인이 적었던 왕 : 단종, 명종, 현종 1명 --> 세조, 예종, 연산군, 인종, 광해군, 효종, 경종, 순조, 순종 2명

종(宗) 평균 : 약 4.7명 
조(祖) 평균 : 약 3.8명  
군(君) 평균 : 약 2명

조(祖)보다 수명도 재위 기간도 짧았던 종(宗)이 부인 수는 더 많았다. 부인 수가 수명과 재위 기간에 영향을 미친 것인가? 

5. 평균 자식 수 : 아들 4.7명, 딸 4명, 총 8.7명, 27명 왕의 총 자녀 수는 235명
자식이 많았던 왕 : 태종 29명 --> 성종 28명 --> 선조 25명 --> 정종 23명
자식이 없었던 왕 : 단종, 인종, 경종, 순종

종(宗) 평균 : 아들 4.7명, 딸 4.1명, 총 8.8명, 종(宗)은 
조(祖) 평균 : 아들 5.3명, 딸 4.4명, 총 9.7명, 조(祖)는 
군(君) 평균 : 아들 2.5명, 딸 1.5명, 총 4명, 군(君)은 

부인은 종(宗)이 더 많았는데 자녀는 조(祖)가 더 많았다. 부인 수보다 수명과 재위 기간이 더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종(宗, 조(祖), 군(君) 공히 딸보다 아들이 많았다. 그때는 초음파도 없었고 낳기 전에는 아들인지 딸인지 몰랐을 텐데 자연적으로 아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왕자 생산으로 한몫 잡으려고 했던 왕비와 후궁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냥 한번 재미삼아 해본 것 뿐이며,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5월 08, 2017

에피쿠로스

쾌락과 행복에 관해 생각해 보자면, 그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막연하기도 하고 두루뭉수리하기도 하다. 
언뜻 쾌락이라고 하니,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여러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또한, 행복이라고 하니 ‘돈’, ‘물질’, ‘재산’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 추상적 관념을 누구도 정확하게 개량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자신의 행복지수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데, 에피쿠로스 철학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가끔 생각해 보지만 그 답은 언제나 ‘모르겠다’이다. 이유인즉,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불명확하기 때문인 듯하다. 스스로 행복에 대한 기준을 세우지 않고 일반 통념에 비추어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어디서부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지 누구도 정확한, 과학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이 좋아 ‘돈이 전부가 아니다.’ 라고 하지, 그 사실을 100%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왕 금전적, 물질적인 것이 부족하다면 정신적 행복이라도,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니, 제대로 한번 누려봄은 어떨까 한다. 



“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락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볼 때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는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피쿠로스하면, 우리는 언뜻 ‘쾌락’을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다. 그가 말한 쾌락(pleasure)은 방탕한 환락이 아니라, 고통과 혼란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평정(아타락시아)를 의미한다. 
그는 “쾌락은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목표이다.”, 라고 했고, “모든 행복의 시작과 뿌리는 위(胃)의 쾌락이다.”, 라고도 했다. 그는 부유한 사람 후원으로 아테네에 행복 증진을 위한 철학학교를 열었고 남녀 모두에게 입학을 허락했으며, 함께 어울려 살면서 쾌락을 연구하도록 했다고 한다. 

스토아학파인 디도티모스는 에피쿠로스가 술에 취하거나 성적 광란에 빠져 썼다는 음탕한 내용이 담긴 편지 50통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 철학은 500년 동안 세계 각지에 영향력을 미쳤다. 거의 대부분은 사실과 달랐던 모양이다. 

Epicurean : 쾌락 추구에 몰두하는, 안일을 좋아하고, 감각적이고, 탐욕스러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이런 의미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단어 중간에 ‘cure’라는 철자가 아주 절묘해 보인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주의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 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원인 모를 우울증과 욕망의 충동을 해석하도록 도와주고, 행복을 추구할 때 그릇된 계획을 세우지 않도록 돌보아 주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철학의 임무이자 핵심이다. 에피쿠로스는 큰 집도 없었고 포도주 대신 물을 주로 마셨다고 한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의 주요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우정
2. 자유
3. 사색 

“만약 우리에게 돈은 있는데 친구와 자유, 사색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고, 비록 부는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친구와 자유, 사색을 누린다면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또 돈, 질병, 죽음 및 초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분석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일어날 시점에 아무 문제도 야기하지 않을 어떤 일을 두고 미리 걱정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 이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은 심리적 재산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지, 물질적인 결과물과는 상대적으로 관계가 적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에 백 퍼센트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철학적 사유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고 욕심을 버리고 참된 자아를 찾는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5월 07, 2017

이방인, 소크라테스

알베르 카뮈 작(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 한 명을 총살한 혐의로 기소된다. 엄마를 양로원에 보낸 것, 엄마 시신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 것, 엄마 죽음을 무관심하게 대한 것, 엄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 장례식을 치르고 여자와 해수욕을 간 것, 여자와 영화를 본 것 등이 살인죄에 더해져 사형 선고에 큰 영향을 미친다. 뫼르소는 쏟아지는 심문과 증언에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고, 모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도 모두 사실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70세 즈음에 아테네 시민, 시인 멜레토스, 정치인 아니토스, 웅변가 리콘 등으로부터 괴상하고 사악한 인간이라고 비난 받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신들을 숭배하지 않았고, 사회적 기틀을 깨뜨렸으며, 젊은이들이 아버지에게 대들도록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배심원 판결을 통해 사형을 선고 받았다. 

뫼르소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다수 생각과 달랐다는 이유로 공히 비난 받았고, 비전문가 집단인 배심원 결정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았다. 또한 자신의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을지 어떨지 몰라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조금도 꺼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문지기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고, 둘이서 함께 피웠다.

“장의사에서 조금 전부터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와서 관을 닫으라고 해야겠는데, 그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안 보겠다고 말했다.

~ <<이방인>> 중에서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은 분명 일반적이지 않다. 우리는 뫼르소가 괴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고 그를 나무랄지 모른다. 
법정에서는 위와 같은 행동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판사도, 검사도, 배심원도 정작 살인 자체와 그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기울인다. 검사는 이런 그의 비상식적 행동을 종합해 볼 때, 유죄가 인정된다고 했다. 살인 자체보다 엄마 죽음 앞에서 그가 행한 일련의 행동이 중요한 유죄 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급기야 변호사가 외친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 <<이방인> 중에서 

뫼르소는 피고인으로서 자신을 철저히 방어하지 않는다. 자기 재판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따돌림 당했다. 뫼르소는 살인자라기 보다 파렴치한 죄인이 되버렸다. 뫼르소는 살인 동기를 묻는 판사 질문에 ‘태양 때문이었다.’, 라고 말한다. 이 말로 인해 그는 배심원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나 뫼르소는 여전히 재판에 관심을 두지 않고 마침내 사형을 선고 받는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 <<이방인>> 중에서  

삶과 죽음 안에서, 부조리한 세상에서 이방인이 된 뫼르소의 소망은 역설적이다. 재판에서는 전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던 뫼르소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타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방인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 모양이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 500명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숨을 쉬는 한, 그리고 지적 능력을 잃지 않는 한, 철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훈계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명료하게 밝히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오. 그대들이 나를 무죄로 하든 말든, 나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그대들은 알게 될 것이오, 일백 번을 더 고쳐 죽는다고 해도 말이오."

~ <<변명>> 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상식을 의심했기 때문에 비난 받았고, 결국 독미나리가 든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맞았다. 위대한 철학자가 비전문가 집단인 배심원 500명의 다수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다수 의견이라 할지라도 철저히 검증되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누구도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 받는 관념이나 사상, 생각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관습이라는 명목으로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저 다수 의견에 맹목적으로 따르고, 깊이 사유하지 않고, 고유한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일들을 게을리 해왔소. 돈을 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군대나 일반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일, 아니면 오늘날 여러 도시에서 조직된 정치적 모임이나 정당에 가입하는 일 등이 그것이오. …… 나는 그들 모두가 정신적, 도덕적 행복보다 실용적 이점을 앞세우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해 왔소.

~ <<변명>> 중에서 

이방인 뫼르소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일반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 이것이 죄라면 죄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철학을 부정함으로써 재판에서 사형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무려 B.C 399년에 70살까지 살았으니, 천명을 누렸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소크라테스는 다수 의견, 오랜 관념을 맹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테네 시민을 깨우치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소크라테스는 오직 진실만을 원했을 뿐이다.  

누구든 이방인이 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하지만 이방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수 생각을 비판없이 맹신하는 것이 이방인이 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검증된 진실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다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오직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5월 04, 2017

상계동 추억


모델비는 쭈쭈바 한 개씩. 계약서는 없으니 나중에 딴소리 말 것.
아파트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애들에게 쭈쭈바 하나씩 사주고 길거리 캐스팅에 성공했다.
상계동에서 2년 살았는데 이 녀석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래도 여자라고 치맛자락 잡은 것좀 보소.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자애는 저렇게 자세를 잡았다. 내 딸이면 좋겠네, 생각했다. 
가운데 녀석은 뭐가 좀 부자연스러웠다. 맨 왼쪽 녀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옹송그리고 앉아 있다. 쭈쭈바 하나로는 어림없지, 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가운데 녀석의 앙다문 입, 이놈도 모델비가 불만이었나!


부자연스러움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프로는 자연스럽지만 아마추어는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 더 인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할 필요 있나, 사진 한 장 찍는 데…... 




몇 장을 더 찍었더니 그새 표정이 자연스러워졌다. 녀석들은 프로였다. 
쭈쭈바 하나에 최선을 다해 제 역할을 해냈다. 쭈쭈바가 아니고 투게더를 한 통씩 사줬어야 했다. 

몇 년 동안 취미생활로 사진을 찍었다. 장비에 들인 돈이 적지 않았다. 너무 비싼 건 사지 못했지만 그래도 ‘뽀대’나는 구색은 필요했다. ‘장비빨’,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목이 있으니.
카메라와 렌즈는 감가상각비가 적다. 실컷 가지고 놀다가 되팔면 손해를 많이 보진 않는다, 이게 핑계였다. 
카메라와 렌즈로 사진 실력을 감췄다. 남들 보기에는 프로 사진사처럼 보이도록, 장비만 보면 뭐 대단한 사진이 나올 것 같았다. 

DSLR도 여러 대 바꿨고 필름카메라 역시 여러 대를 가졌었다. 캐논, 니콘, 펜탁스 등 여러 브랜드 제품을 사용해봤다. 
필름 카메라는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중고를 사야했고, 디지털 시대라 값이 싸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DSLR 따위는 필름 감성을 담아내지 못 한다며, 그래도 사진은 필름에 담아야 한다며, 한 장 한 장 신중을 기해 찍어야 진짜 사진이 나온다며 주워들은 풍월을 읊었다. 
지금 밝히는 것이지만 회사에는 외근 간다고 하고 사진 찍으러 간 적도 여러 번 된다. 

사진을 찍으면 세상이 다시 보인다. 모든 것을 프레임에 담아서 보게된다. 빗물 하나, 눈 한 송이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길 가는 모든 이가 모델처럼 보인다. 연탄 한 장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의미 있는 객체로 보인다. 그땐 그게 신기했다. 똑같은 세상인데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맨눈으로 보는 세상과 달랐다. 의미가 있었다. 느낌이 있었고 감성이 있었다. 

지금은 사진을 전혀 찍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고 가지고 있던 카메라, 렌즈도 모두 처분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장비를 처분한 돈은 다 없어졌다. 장비가 곧 자산이다.
지금은 고작 스마트폰으로 음식 사진이나 몇 장 찍을 뿐이다. 
그때는 사진 얘기를 쉬지 않고 몇 시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메라가 어떻고 렌즈가 어떻고 조리개가 어떻고 노출이 어떻고.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그 무엇에 가장 빠졌던 기억이다. 요즘은 독서에 빠져있지만 사진만큼 오래 갈지 장담 못 하겠다. 욕심은 죽을 때까지 독서를 하는 것이고 자주 하는 것이고 많이 하는 것이지만 사진보다 독서가 불편한 건 사실이다. 

어느덧 10년 이상이 흘렀으니 이 녀석들도 대학생 정도 되었을 성싶다. 모델이 좋으면 좋은 장비가 필요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모델비가 너무 적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부족했던 모델비를 대신해서 소주 한잔 나누고 싶다. 

5월 03, 2017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작품 대부분은 인간의 영적인 성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헤세의 작품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헤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 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 <<데미안>> 중에서

나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다. 이런 중요한 존재 한 명 한 명이 모여 가정을 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구성하며 궁극적으로 전 세계를 구성한다. 하여 세상 모든 이는 개별 개인으로서 그만큼 중요하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 고 했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고 했다. 
존재 하나하나를 자신만큼 귀하게 여길 때, 그런 시스템이 있는 국가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데미안이 말한다.
“만약 네가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느닷없이 아주 힘을 주고 똑바로 그의 눈을 쏘아보는데도 그가 전혀 불안해하지 않거든 포기해!”

자아가 성숙된 사람, 가치관이 확실한 사람, 철학이 확고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연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아만큼 타인 자아도 존중하게 된다. 
무엇이 불안한가? 무엇이 두려운가? 확고한 자아를 가질 때, 스스로 자신을 존중할 때 두려움이 설 공간은 없다.  

‘그렇게 어느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 <<데미안>> 중에서 

자아가 확실한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 배포가 크며 생각이 깊고 넓다. 하여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하수는 기다릴 줄 모른다. 오직 고수만이 기다릴 줄 안다.  

데미안이 말한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이걸 알아야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아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우리 능력을 과소평가 하지 말자. 우리 자신 속에는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잘해낼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 <<데미안>> 중에서

자아는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고 나올 때 자아는 완성된다. 비로소 자신이 된다. 
우리 모두는 신을 가지고 있다. 절반은 착한 신이고 나머지 절반은 악한 신이다. 누구나 착하고 악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만 가지고 있는 우리는 없다. 우리 모두는 '압락사스'를 가지고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나는 단지 ‘살아보려고 하면 된다.’ 

피스토리우스가 말한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 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아를 정확히 앎으로써 자기 능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다.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 인지하지 못하면 그 세계는 돌덩이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 존재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 타인과 비교해서 내 존재를 폄하하지 말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야 한다.  

피스토리우스가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미움은 결국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미움이 그렇다면 사랑도 그럴 것이고 용서도 그럴 것이다. 이미 내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이기고 지는 것,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다. 이것은 철학이고 목적이며 삶이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 <<데미안>> 중에서

내가 있어 세상이 존재하고 타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곧 내가 세상이다. 내가 타인이다. 내가 우주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다면 그 길 끝은 바로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타인 눈이 아닌 자신 눈으로 보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방관자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싯다르타를 사랑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그는 기쁨을 주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그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 자신은 스스로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하였으며 스스로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 못하였다.’‘하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자, 가장 중요한 것, 오로지 딱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모른다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 <<싯다르타>> 중에서 

내가 바로 삶의 목적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건강한 사회가 된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만큼 나 자신은 중요한 존재다. 잊지 말자. 

고타마가 말한다.
“가르침의 목적은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아니오. 그 목적은 번뇌로부터 해탈이오.”

싯다르타가 반박한다.
“세존이시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타인 생각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할 사항이다.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가는 길이다. 

싯다르타가 생각한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색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지혜로운 것은 좋은 일이고, 참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새가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기가 그 새의 죽음을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그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죽은 것이다.’‘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 <<싯다르타>> 중에서 

어지럽다. 욕심이다. 공포다, 증오다. 미움이다. 이 모든 관념은 외부에 있지 않다. 바로 내 속에 있는 것이다. 하여 세상이 그렇게 더럽게 보이는 것이다. 내 몸을, 내 마음을 씻으면 세상은 곧 깨끗히 보일 것이다.  

‘그리움에 애타는 탄식 소리, 깨닫는 자의 웃음소리, 분노의 외침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수천 갈래로 얽혀서 서로 밀착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 <<싯다르타>> 중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자연스러운 그 자체를 보지 못한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우리만의 잣대로 세상을 본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그저 단순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소란스럽게. 세상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 세상을 보는 우리가 흔들리고 있고 복잡할 뿐이다. 

싯다르타가 말한다.
“누군가 구도(求道)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한쪽만 보게되면 다른 쪽을 전혀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압락사스’라는 신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단 두 쪽으로 쪼갤 수 없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죄악과 신성함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결국 이 모든 것은 똑같은 것이다. 

싯다르타가 말한다.

“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5월 01, 2017

철로 된 강물처럼(Ordinary Grace)

잔잔한 호수에 누군가 돌을 던졌다. 와이파이 안테나처럼 파문이 인다. 한 번도 파문이 인 적 없는 호수에 어떤 이유로 파문이 점점 커져만 간다. 파문은 또다른 파문을 낳는다. 의심하고, 송곳 같은 말로 상대를 찌른다. 

조용한 도시 뉴 브레멘에서 ‘약간 모자라는’ 바비 콜이 열차에 치여 사망하면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작가는 담담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한다. 마치 모든 것이 익숙한 일상인 것처럼.
작가는 과하지 않게 소설을 그렸다.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호수 깊숙이 빠진다. 너무 익숙해서, 그럴 법해서 호수에 빠져 들고 있는지 인식하지도 못한 채 파문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만든다. 
아주 평범한 문장으로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쩌면 우리는 파문이 일기를, 누군가 파문을 일으켜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도 파문을 일으킨 가해자이면서 자신이 일으킨 파문은 파문이 아니라고 변호한다.  조용한 호수는 재미 없고 자극적인 뉴스가 필요한 우리는, 어제보다 더 자극적인 내일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문은 점점 커져가지만 결국 사라지고 만다. 사라지지 않는 파문은 없다. 파문은 찰나에 불과하며 용서와 사랑은 영원하다. 



이 소설, <<철로 된 강물처럼>>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내가 철도 선로를 왜 좋아하는지 아니? 항상 저기 있지만 또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지.” “강물처럼요.” 제이크가 말했다.

익숙한 문구다. 놀랍게도 헤르만 헤세 작(作) <<싯다르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순간마다 새롭다.

과거는 점점 길어지고 현재는 찰나와 같으며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나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과거로 가고 있고 동시에 미래로 가고 있다. 강물처럼, 철로 된 강물처럼. 
현재는 짧아 놓치기 쉽다. 과거는 길어서 후회하기 십상이다. 미래는 불안하나 희망차다. 
용서할 줄 아는 마음, 인정할 줄 아는 관용, 이해할 줄 아는 슬픔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관심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을 가지기 어려운 이유는 찰나에 불과한 ‘지금'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책 원제(原題)는 <<Ordinary Grace>>다. 충분히 공감되는 제목이다. 번역된 제목, <<철로 된 강물처럼>>은 지극히 한국적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역시 깊이 공감된다. 
올해 읽은 책 약 70권 중에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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