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3, 2017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작품 대부분은 인간의 영적인 성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헤세의 작품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헤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 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 <<데미안>> 중에서

나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다. 이런 중요한 존재 한 명 한 명이 모여 가정을 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구성하며 궁극적으로 전 세계를 구성한다. 하여 세상 모든 이는 개별 개인으로서 그만큼 중요하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 고 했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고 했다. 
존재 하나하나를 자신만큼 귀하게 여길 때, 그런 시스템이 있는 국가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데미안이 말한다.
“만약 네가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느닷없이 아주 힘을 주고 똑바로 그의 눈을 쏘아보는데도 그가 전혀 불안해하지 않거든 포기해!”

자아가 성숙된 사람, 가치관이 확실한 사람, 철학이 확고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연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아만큼 타인 자아도 존중하게 된다. 
무엇이 불안한가? 무엇이 두려운가? 확고한 자아를 가질 때, 스스로 자신을 존중할 때 두려움이 설 공간은 없다.  

‘그렇게 어느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 <<데미안>> 중에서 

자아가 확실한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 배포가 크며 생각이 깊고 넓다. 하여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하수는 기다릴 줄 모른다. 오직 고수만이 기다릴 줄 안다.  

데미안이 말한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이걸 알아야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아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우리 능력을 과소평가 하지 말자. 우리 자신 속에는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잘해낼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 <<데미안>> 중에서

자아는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고 나올 때 자아는 완성된다. 비로소 자신이 된다. 
우리 모두는 신을 가지고 있다. 절반은 착한 신이고 나머지 절반은 악한 신이다. 누구나 착하고 악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만 가지고 있는 우리는 없다. 우리 모두는 '압락사스'를 가지고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나는 단지 ‘살아보려고 하면 된다.’ 

피스토리우스가 말한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 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아를 정확히 앎으로써 자기 능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다.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 인지하지 못하면 그 세계는 돌덩이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 존재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 타인과 비교해서 내 존재를 폄하하지 말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야 한다.  

피스토리우스가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미움은 결국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미움이 그렇다면 사랑도 그럴 것이고 용서도 그럴 것이다. 이미 내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이기고 지는 것,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다. 이것은 철학이고 목적이며 삶이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 <<데미안>> 중에서

내가 있어 세상이 존재하고 타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곧 내가 세상이다. 내가 타인이다. 내가 우주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다면 그 길 끝은 바로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타인 눈이 아닌 자신 눈으로 보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방관자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싯다르타를 사랑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그는 기쁨을 주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그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 자신은 스스로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하였으며 스스로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 못하였다.’‘하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자, 가장 중요한 것, 오로지 딱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모른다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 <<싯다르타>> 중에서 

내가 바로 삶의 목적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건강한 사회가 된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만큼 나 자신은 중요한 존재다. 잊지 말자. 

고타마가 말한다.
“가르침의 목적은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아니오. 그 목적은 번뇌로부터 해탈이오.”

싯다르타가 반박한다.
“세존이시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타인 생각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할 사항이다.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가는 길이다. 

싯다르타가 생각한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색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지혜로운 것은 좋은 일이고, 참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새가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기가 그 새의 죽음을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그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죽은 것이다.’‘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 <<싯다르타>> 중에서 

어지럽다. 욕심이다. 공포다, 증오다. 미움이다. 이 모든 관념은 외부에 있지 않다. 바로 내 속에 있는 것이다. 하여 세상이 그렇게 더럽게 보이는 것이다. 내 몸을, 내 마음을 씻으면 세상은 곧 깨끗히 보일 것이다.  

‘그리움에 애타는 탄식 소리, 깨닫는 자의 웃음소리, 분노의 외침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수천 갈래로 얽혀서 서로 밀착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 <<싯다르타>> 중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자연스러운 그 자체를 보지 못한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우리만의 잣대로 세상을 본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그저 단순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소란스럽게. 세상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 세상을 보는 우리가 흔들리고 있고 복잡할 뿐이다. 

싯다르타가 말한다.
“누군가 구도(求道)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한쪽만 보게되면 다른 쪽을 전혀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압락사스’라는 신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단 두 쪽으로 쪼갤 수 없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죄악과 신성함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결국 이 모든 것은 똑같은 것이다. 

싯다르타가 말한다.

“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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