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4, 2017

상계동 추억


모델비는 쭈쭈바 한 개씩. 계약서는 없으니 나중에 딴소리 말 것.
아파트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애들에게 쭈쭈바 하나씩 사주고 길거리 캐스팅에 성공했다.
상계동에서 2년 살았는데 이 녀석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래도 여자라고 치맛자락 잡은 것좀 보소.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자애는 저렇게 자세를 잡았다. 내 딸이면 좋겠네, 생각했다. 
가운데 녀석은 뭐가 좀 부자연스러웠다. 맨 왼쪽 녀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옹송그리고 앉아 있다. 쭈쭈바 하나로는 어림없지, 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가운데 녀석의 앙다문 입, 이놈도 모델비가 불만이었나!


부자연스러움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프로는 자연스럽지만 아마추어는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 더 인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할 필요 있나, 사진 한 장 찍는 데…... 




몇 장을 더 찍었더니 그새 표정이 자연스러워졌다. 녀석들은 프로였다. 
쭈쭈바 하나에 최선을 다해 제 역할을 해냈다. 쭈쭈바가 아니고 투게더를 한 통씩 사줬어야 했다. 

몇 년 동안 취미생활로 사진을 찍었다. 장비에 들인 돈이 적지 않았다. 너무 비싼 건 사지 못했지만 그래도 ‘뽀대’나는 구색은 필요했다. ‘장비빨’,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목이 있으니.
카메라와 렌즈는 감가상각비가 적다. 실컷 가지고 놀다가 되팔면 손해를 많이 보진 않는다, 이게 핑계였다. 
카메라와 렌즈로 사진 실력을 감췄다. 남들 보기에는 프로 사진사처럼 보이도록, 장비만 보면 뭐 대단한 사진이 나올 것 같았다. 

DSLR도 여러 대 바꿨고 필름카메라 역시 여러 대를 가졌었다. 캐논, 니콘, 펜탁스 등 여러 브랜드 제품을 사용해봤다. 
필름 카메라는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중고를 사야했고, 디지털 시대라 값이 싸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DSLR 따위는 필름 감성을 담아내지 못 한다며, 그래도 사진은 필름에 담아야 한다며, 한 장 한 장 신중을 기해 찍어야 진짜 사진이 나온다며 주워들은 풍월을 읊었다. 
지금 밝히는 것이지만 회사에는 외근 간다고 하고 사진 찍으러 간 적도 여러 번 된다. 

사진을 찍으면 세상이 다시 보인다. 모든 것을 프레임에 담아서 보게된다. 빗물 하나, 눈 한 송이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길 가는 모든 이가 모델처럼 보인다. 연탄 한 장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의미 있는 객체로 보인다. 그땐 그게 신기했다. 똑같은 세상인데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맨눈으로 보는 세상과 달랐다. 의미가 있었다. 느낌이 있었고 감성이 있었다. 

지금은 사진을 전혀 찍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고 가지고 있던 카메라, 렌즈도 모두 처분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장비를 처분한 돈은 다 없어졌다. 장비가 곧 자산이다.
지금은 고작 스마트폰으로 음식 사진이나 몇 장 찍을 뿐이다. 
그때는 사진 얘기를 쉬지 않고 몇 시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메라가 어떻고 렌즈가 어떻고 조리개가 어떻고 노출이 어떻고.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그 무엇에 가장 빠졌던 기억이다. 요즘은 독서에 빠져있지만 사진만큼 오래 갈지 장담 못 하겠다. 욕심은 죽을 때까지 독서를 하는 것이고 자주 하는 것이고 많이 하는 것이지만 사진보다 독서가 불편한 건 사실이다. 

어느덧 10년 이상이 흘렀으니 이 녀석들도 대학생 정도 되었을 성싶다. 모델이 좋으면 좋은 장비가 필요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모델비가 너무 적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부족했던 모델비를 대신해서 소주 한잔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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