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에 들어간 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초초함과 불안함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보호자대기실에 지구만 한 큰 징을 때리 듯 전화 벨이 울렸다. 수술실에서 보호자를 찾는 전화였다.
가슴이 뭍에 올라온 붕어새끼처럼 펄떡이고 있었지만 옆에 있는 다른 동생을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큰형인 내가 들어가야 할 터였다.
나는 두꺼운 수술실 문을 밀고 내 발로 걸어 들어갔다. 놀랍게도 수술실 바로 안쪽은 신생아실이었다.
한 생명은 태어나고 한 생명은 스러져 가고, 강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고 까끌한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킨 후 긴 호흡을 하던 차에 날 기다리던 간호사가 손짓했다. 마치 지옥행 열차에 오르라는 듯이.
간호사가 준 위생 가운을 입고 동생이 수술 중인 베드 근처로 이동했다. 동생은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아까 본 신생아 같았다. 동생 머리 쪽에서 발 쪽으로 이동하는 순간 난 시뻘건 뱃속 창자를 보고 말았다. 어릴적 시골에서 민물고기를 낚은 후 배를 딸 때 본 내장 같았다. 수술 칼이 배를 가른 것인지, 바람이 가른 것인지, 암 세포가 가른 것인지, 소주와 담배연기가 가른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10시간 넘도록 첫 수술을 했고 그 후 5년은 잘 살았다.
몇 달에 한 번씩 총 17차례 항암치료를 했고 중간에 수술을 두어 번 더했다. 대장이 막혀, 전이된 모양이었다, 오른쪽 아랫배에 인공항문을 달았다. 인공항문 때문에 혹여 냄새가 밖으로 샐까봐 고속버스를 타지 못했다. 몸이 힘들어도 200킬로를 직접 운전해서 서울로 왔다. 그가 운전을 한 것인지, 암 세포가 한 것인지, 바람이 한 것인지, 살고자 하는 의지가 한 것인지, 김유신의 말처럼 차가 스스로 병원을 향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항암주사를 맞았고 주사 독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운전해서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반복했다. 반복했다.
끝이 없는 반복, 반복이 어어져 끝나야 좋을지 지속돼야 좋을지 헷갈렸다.
살 만하다고 느꼈는지, 살고 싶었는지 첫 수술 후 자전거를 열심히 탔다. 비싼 자전거를 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죽으라고 운동했다. 그때는 암 환자가 맞나 싶었다. 완치의 축배를 너무 일찍 들었는지 모르겠다.
세월은 더딘 듯 빠르고 빠른 듯 더디더니 벌써, 아니 이제 3년이 지났다. 세월호가 침몰되기 닷새 전이었다.
죽기 전 몇 달을 시골 병원에서 사실상 죽은 상태로 지냈다. 그때는 나도 입원 중이었고 퇴원 후에도 거동이 많이 불편해서 동생의 마지막을 볼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모르핀으로 하루하루, 하루하루, 하루하루, 이미 정신이 떠난 육신을 가까스로 숨쉬게 하고 있었을 터였다.
3일장을 치렀고, 화장했다. 꽃상여는 타지 못했다.
나는 죽은 날 화장하자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2촌인 내가 1촌인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 말을 들었다.
가는 길 불편을 난 살피지 못했다. 가는 길이 편해서 또 무엇하랴! 동토에 묻히기는 싫었는지 봄을 앞섶에 맞으며 떠났다. 벚꽃이 노래할 때 떠났다.
손님이 많이 왔다고 노구의 아버지가 그래도 좋아하셨다.
당신 묏자리를 아들이 먼저 차지했다고 슬퍼하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