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그 자체 외에 아무 것도 모를 수 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면 여타 동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내가 원했던 삶을 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정확하게 보고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보고 있을까? 내가 하는 말은 공허하지 않은가? 이름 석 자는 나를 얼만큼 표현해 주고 있을까? 얼굴 표정은 나를 어떻게 말해 주고 있을까? 누가 나에게 ‘나’다움을 지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무척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확신하는 것이 우리 세계 중 지극히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모르는 자신, 알려고 하지 않는 자신,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신.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볼 때, 타인을 평가할 때 공정한 잣대를 가지기는 그래서 힘들다. 아니 사실 상 불가능하다.
말과 글로써 자신은 표현되고 드러난다. 하여 말과 글은 곧 자신이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말하고 쓰는 글은 대부분 매우 제한적이다. 제한된 말과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 남을 평가하게 된다. 우리 생이 일백 페이지라면 평생 겨우 몇 페이지만 채울 뿐이며 그마저도 공허할 뿐이다. 타인이 쓴 글을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면 자기 내면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 안다는 경솔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말이 맞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 라는 책을 읽게 된다. 아주 우연히.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레고리우스는 서점 주인이 번역해 준 책 서문을 듣고, 단지 서문 몇 문장만 듣고서 엄청난 격정을 느낀다. 평생 고전문헌학자로서 살아온 그레고리우스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흔든 아마데우를 만나기 위해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어떤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저자를 찾아가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어떤 감동을 받았기에 주저 없이 스위스 베른에서 리스본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레고리우스가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데우? 자신? 실존? 존재?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無)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는 아닌지.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통해서 나와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과 글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일까? 누가 나에 대해 말할 때, 내가 그에 대해 말할 때,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내 생각은 여전히 똑같은가? 그렇다면 내 생각이 틀린 것인가? 상대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변한 것인가? 모두가 변한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시점에 우리가 진정 우리인가? 그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할 때, 이 말이 효과가 있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우리를 스치고 흘러가는 생각과 상(像)과 느낌의 강물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 강물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자신의 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말을 쓸어내고 지워버린다. 혹시 남겨둔다면 기적이다. 나는 다른가? 내 마음의 강물이 방향을 바꿀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하는 것. ……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악(惡)이 있어 선(善)을 알고 약(弱)이 있어 강(强)을 알 수 있듯이, 실망이 있어 만족을 알 수 있다. 네가 있어 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있어 ‘함께’ 소주 한잔 마실 수 있다. 네가 없다면 누가 내 이름을 불러 줄 것인가? 네 덕에 내가 산다. 네 존재는 내게 큰 기쁨이다. 네 존재는 내 삶을 가치 있게 한다.
황량한 벌판에 꽃 한 송이 있다한들 그 이름을 불러줄 이 없으면 무슨 소용 있으랴!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 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난 흥분했다. 덜컥거리는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이 기차에서 절대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기차의 궤도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속도도 정할 수 없다는 것. 기차가 보이지도 않고, 누가 기차를 운전하는지, 기관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 없다. ……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끊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 내 존재에 대한 성찰, 타인과 관계하는 삶. 책은 차분하면서도 따분하지 않게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같은 제목 영화가 있지만, 책만큼 세밀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또한 책 내용과 영화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다. 각색 과정에서 영화다운 이야기를 넣은 듯하다. 책을 길지만 영화는 짧다. 책을 다 읽고 영화를 보면 더 큰 감동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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