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 2017

묵호항

동해고속도로 망상IC를 빠져 나와 시내 쪽으로 우회전해서 십 분 정도 차를 달리면 묵호항이 나온다. 묵호항에는 생선 냄새와 바다 냄새가 합쳐진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나는 그 냄새가 좋다. 메슥거리는 비린내를 한참 덜어낸, 기분 좋은 비릿함이다. 들큼하고 달곰한 것에 사람 냄새까지 더해지니 마치 품속처럼 아늑하다



괴괴한 밤에 바닷가로 나가면 수평선 멀리 엄청난 빛을 뿜는 배가 복달거리며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오징어잡이 배다. 마음 같아선 그 배에 한번 타보고 싶기도 하지만 태워 줄 리 만무하다. 만선을 위해 새벽잠 설치며 파도에 맞서 고기 잡는 이들의 팥죽 같은 땀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자음 ‘ㅅ’ 같은 테트라포드가 도열해 있는 방파제 끝에는 붉은색 등대가 우두머리처럼 우뚝 서있다. 등대 맨 꼭대기에는 갈매기떼가 망원경도 없이 동해바다를 시찰하고 있다. 거대한 테트라포드는 ‘쏴아쏴아’하는 파도 소리가 방파제에 부딪혀 자음 ‘ㅅ’만 남은 것 같은 모양새다.  켜켜이 쌓여 있는 테트라포드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듯 보이고 그 벽면을 따라 개미만큼 작은 게들이 행군을 하기도 한다. 이 게들에게 테트라포드는 만리장성과 다름없다. 이놈들이 테트라포드를 보고 훈민정음을 깨닫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저 거대하고 많은 테트라포드를 어떻게 옮겼고 저렇게 마침맞게 쌓았는지 참 모를 일이다. 
방파제 옆을 돌면 바닷가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바짓단을 걷고 찬물에 발을 담그면 노곤했던 몸이 그 선득함에 화들짝 놀라 천년 묵은 피로도 히뜩 사라진다.  욕심에 조금 깊은 곳으로 발을 내딛다 보면 어느새 파도가 무릎까지 차올라 빨랫감이 늘어난다. 

묵호항 바로 옆에는 횟감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여럿 모여 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어판장이라고 한다. 어판장 한쪽에는 아주머니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어판장에서 산 횟감을 즉석에서 먹기 좋게 떠준다. 그런 냄새가 모여서 비릿한 추억이 된다. 바다 냄새, 사람 냄새, 인생 냄새. 냄새만으로 이미 자연산 회를 한 접시 먹은 듯하다.  

어판장 앞에는 건어물을 파는 노점상이 여럿 있고, 그 와중에 호박엿을 파는, 틈새시장을 노리는 아저씨도 있다. 가윗소리가 어찌나 경쾌한지 안 사곤 못 배긴다. 울릉도 호박엿이라고 하는데 굳이 브랜드 마케팅을 안 해도 맛이 좋다. 그 동네 사람들이 ‘피데기’라고 하는 반건조오징어는 그 맛이 참 기막히다. 딱딱하지 않아서 씹기 편할 뿐더러 성냥개비 같은 초고추장을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 동해바다를 통째로 삼킨 듯하다. 

배가 정박해 있는 묵호항 근처를 어정버정 하다 보면 낚시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비트적비트적 걸으면서 뽕짝을 한가락 하는 아저씨를 만나기도 한다. 어렵사리 고기가 낚이는데 대부분 작은 고기다. 보고 있으면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 생각도 나고 인생이 뭐 별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묵호항 건너편에 조그만 시장이 있고 시장 어귀에서 건어물을 파는 할머니가 계신다. 처가에 갈 때면 그 앞을 지나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유찬이 왔나!” 하시면서 우리 아들에게 만 원짜리를 덥석 쥐어 주신다. 일년에 한두 번 겨우 방문하는데 어떻게 아들 놈 이름을 기억하시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오만 원권이 생기면서 아들 수입이 다섯 배로 늘었다. 누구에게 감사할지 몰라 난 우선 조폐공사 사장님을 떠올렸다. 그 돈 모아서 녀석은 자전거 사는 데 보탰고 컴퓨터 사는 데 보탰다. 

시장 반대편 끝에 은성목욕탕이라고 있다. 목욕탕 입구 옆에 마치 붙박이장 같은 개집이 있고 그 안에 사나운 개가 있는데 내가 개띠인 걸 아는지 나를 보면 엄청나게 짖어댄다. 그때마다 난 “네가 ‘개’라서 여태 살아 있는 거야. ‘게’였다면 넌 벌써 내 밥이 됐다.” 라고 말하며 더 짖기 전에 조심스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다. 
목욕탕 안에는 열탕, 온탕, 냉탕이 각 하나씩 있고 그 유명하다는 핀란드식 증기 사우나도 있다. 한켠에 신기한 물건이 있는데 이른바 자동 때밀이다. 둥근 접시 모양에다 까칠한 때수건을 입힌, 장영실도 울고 갈 세계적인 발명품이다. 대야에 찬물 한가득 담아서 접시에 흩뿌린 후 등을 기대면 접시가 돌면서 시원하게 때를 민다. 대중화가 안 된 걸 보면 그리 성공적인 발명품은 아닌 것 같다. 하여 장영실은 의문의 일 패를 벗어났다.  

그 시골 작은 항구도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는 제법 차가 막힌다. 검정색 비닐 봉다리에 든, 갓 손질한 횟감을 바투 잡고서 차에 오르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행복이 묻어난다. 얼마 전에 가보니 그 방파제 옆에 구식 횟집을 정리하고 깔끔한 새 건물을 올렸는데 왠지 어색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다림질한 듯 말쑥한 횟집이 시골 항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이러구러 하루가 지나는 묵호항에는 늘 ‘오도독 오도독’ 회 씹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께느른한 몸을 이끌어 서울로 돌아오면 묵호항 냄새가 며칠 동안 떠나지 않는다. 여느 시골처럼 묵호항에도 젊은이는 보이지 않고 노인들뿐인데 내 머릿속 그 풍경이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다. 묵호항에서 태어난 아내와 99년에 결혼했고 매년 한두 번 갔으니 아마도 삼사십 번은 간 모양이다. 

세상 싫을 땐 거기 가서 혼자 아무 생각 없이 며칠 묵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6월 24, 2017

두 남자와 자전거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 녀석은 정리정돈 안 하고 어지럽히기 대마왕이다. 양말은 저쪽에 팬티는 이쪽에. 책상 위는 과자 봉지, 책, 노트, 볼펜 등으로 늘 엉망이다. 사실 대마왕까지는 아니고 그 또래에 다 그런 정도. 하여튼. 

녀석에게 자전거를 한 대 사주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자전거는 늘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자전거에 대한 욕심이 커져 갔고 좋은 자전거로 기변을 노리고 있었다. 좋은 자전거란 곧 비싼 자전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들 놈 친구 아빠가 마침 삼천리자전거 본사에 근무하는 분이라서 기존에 타던 자전거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었다. 집사람은 다시 그분에게 부탁하자고 했지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던 참이었다. 또한 녀석이 원하는, 사고 싶은 자전거는 따로 있었다. 

나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는데 자전거로 유명한 동네였다. 동네방네 자전거 없는 집이 없고 등하교 시간 아스팔트에는 마치 피난민 같은 자전거 행렬로 가득했다. 아마 전국에서 가장 먼저 자전거 도로가 생긴 동네일 것이다. 지금은 자전거박물관도 있다. 그래서 자전거에 익숙하지만 나는 자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 자전거를 한 번도 가진 적 없다. 

녀석에게 자전거를 사주기로 하고 어떤 자전거를 원하는지 물었더니 글쎄 인터넷 쇼핑몰에서 몇 가지 고른 후 링크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보니까 팔십만 원이 넘는 것도 있고 제일 싼 게, 그러니까 자기 딴에 제일 후순위였던, 오십만 원 정도였다. 물론 엄청나게 비싼 자전거가 많은 걸 안다.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자전거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녀석에게 백만 원 가까운 자전거를 사주기는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녀석이 휴대전화 액정을 깨먹었다. 벌써 몇 번짼지. 수리비가 15만 원 정도 나왔는데 너무 화가 나서, 액정 깨진 것 자체보다 조심성 없는 것 때문에 화가 났다, 벌로 올해 자전거 사주기로 한 것은 취소라고 말했다. 녀석은 별말은 없었지만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며칠이 지나 하도 마음에 걸려서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고 제일 후순위인 50만 원 정도하는 자전거를 주문했다. 그 자전거가 주문 삼일만인 그제 집으로 배달이 됐다. 요즘은 자전거가 완전 조립 상태로 배송이 된다. 집에서 간단하게 페달만 달면 바로 탈 수 있도록.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녀석이 거실 바닥에 자전거를 거꾸로 눕혀 두고 여기저기 물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천방지축 중1이 자전거를 닦고 있다니. 사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하고 모처럼 외식을 하고 집에 왔는데 녀석이 크로스백을 주섬주섬 하더니 잠시 동네 공원에 갔다 오겠다고 한다. 크로스백을 열어 보니 온갖 공구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딴에 스스로 정비를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현관문 앞에 이전에 타던 자전거가 아직 있는데 그걸 보면서 녀석이 껄껄 웃는다. 마치 이런 똥 같은 것을 어떻게 타고 다녔는지 한심하다는 듯이 말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쓰는 맥북 프로는 이백만 원짜리고, 아이폰은 백만 원 언저리에 샀다. 타는 차는 약 6년 전에 이천오백만 원을 주고 산 것이다. 아이에게 그 정도 자전거를 사주지 않을 명분은 내게 없었다. 

아이 휴대폰을 구매하면서 분실, 파손보험을 들었는데 보험료가 입금이 되어서 사실상 액정 수리비는 별로 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아이한테 하지 않았다. 
50만 원짜리 자전거를 주문하고 나서 애하고 굳게 약속을 했다. 
“엄마한테는 30만 원에 샀다고 말해.”



내 막냇동생은 6년간 암 투병 끝에 2014년에 죽었는데, 암 수술 후 운동할 요량으로 자전거를 탔었다. 
한 이백만 원 정도 하는 자전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열심히 탔다. 아침 먹고 자전거, 점심 먹고 자전거, 저녁 먹고 자전거였다. 자전거 동호회도 들었고 들로 산으로 매일 자전거 타는 게 일이었다. 매일 그렇게 3, 4년을 탔다. 살아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 죽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동생은 결국 재발 및 전이로 죽었다. 

죽기 몇 달 전 동생이 카톡으로 자기가 타던 자전거 사진 여러 장을 보내왔다. 휴대폰 카메라로 곱게도 찍어 보냈다. 앞 사진, 옆 사진, 뒷 사진 등 골고루 꼼꼼하게 찍어 보냈다. 어디서 찾았는지  말끔한 곳을 배경으로 바윗등 같은 곳 위에 자전거를 얹어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타던 자전거를 중고나라 같은 데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뭔지 그때 깨달았다. 동생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도저히 그 자전거를 중고나라에 올릴 수 없었다. 
카톡에 이런 메시지가 함께 있었다. 
“형 미안해. 자전거 판 돈으로 형 용돈이나 해."

동생이 죽은 후 카카오 스토리를 살펴봤더니 사진과 글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늘로 가기 전에 미리 다 지운 것이다. 왜 지웠을까 궁금했지만 때가 늦어 물어볼 수 없었다. 그 고독했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현생을 모조리 지우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다.  
동생 카스에는 다만 딱 한 장 사진이 남아 있었다. 프로필 사진이었다. 


동부간선도로와 나란히 중랑천변으로 자전거 도로가 있는데 출퇴근길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저 사람들은 건강할까? 뭐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자전거를 탈까 생각하곤 한다.  
자전거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 그게 무엇이든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동생이 타던 자전거를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 옆에 뒀어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지금 그 자전거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다.   

6월 19, 2017

마티네의 끝에서

흔히, 운명이라고 하고 인연이라고도 한다. 
운명이라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인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여 우리는 운명이나 인연이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된다. 운명과 인연이 늘 해바라기처럼 웃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반대로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이 운명과 인연을 바뀌게 하는 수레바퀴일 수도 있다. 바뀐 후나 바뀌기 전이나 모두 운명인 건 마찬가지다. 갈림길에서 한쪽을 택하는 경우 나머지 한쪽은 버려야 한다. 양쪽 모두를 택할 수는 없다. 세월이 흘러, 그때 택하지 않은 다른 한쪽을 택한다 해도 이미 그건 과거일 뿐이고 새로 선택한 한쪽은 전혀 다른 미래가 된다. 어느 순간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미래와 과거가 바뀌게 된다. 때론 타인이 개입해서, 자기 선택과 무관하게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운명과 인연이 겹쳐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과정, 사랑. 
가슴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이 있어도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싹트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순 없으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를 공유하기까지 운명과 인연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곁에 없습니다. 어느날 미래에서 그녀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은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있다면, 인연이 있다면 그녀를 반드시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운명이라 해도 미리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우리는 영원을 약속하게 된다.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그저 언어로만 서로를 알아왔던 두 사람은 이제 몸이 더해져 서로를 바라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두사람이 되었다. 이미 까마득히 앞서가서 거의 상대와 녹아들기 직전까지 흥분했던 자신들의 언어를 좇아가려 했지만 그 진지함과 다양한 애정의 암시에도 갑작스럽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다. 

운명을 믿고, 인연을 믿고 사랑을 약속하지만 운명과 인연 사이에 타인이 끼어든다. 심장을 도려내는 간섭. 
만약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한다면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운명과 인연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온다. 이제 이전 사랑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운명과 인연이 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운명과 인연 역시 또다시 또 다른 운명과 인연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운명과 인연은 돌고 돈다. 때문에 사랑도 돌고 돈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느끼지 못하는 공기처럼, 투명한 물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미래에서 온 사랑은 현재 사랑을 파괴한다.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랑을 지워야 한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 묻어야 한다. 과거 속에 묻은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다. 미래가 과거를 바꾼 것이다. 사랑이란 미래로 향하는 약속이다. 하여 과거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힌다. 이끌림에 이끌려 새로운 사랑이 미래에서 찾아 온다. 

“지구 어딘가에서 요코 씨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죽을 거예요.”

“요코 씨가 자살한다면 나도 할 거예요. 이건 나만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온다면 그건 나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줘요.”

이미 약혼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마키노. 
그리고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요코
요코와 약혼한 남자, 리처드.
마키노를 빼앗으려는 여자, 미타니 

“나, 이제 곧 결혼해요.”
“그러니까 내가 그걸 막으러 왔죠.”

“어렵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만나버렸잖아요? 그 사실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요. 고미네 요코라는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생이라는 건 나한테는 이미 비현실적이에요. 내가 살아 있는 이 현실에는 요코 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내 곁에 계속 존재해줬으면 좋겠어요. 날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소나기처럼 갑자기 새로운 사랑이 찾아 왔지만 그 사랑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은 감정이다. 형태가 없어서 취하기 어렵다. 그래서 말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키노 씨가 마드리드에 가 있는 동안에 그 사람하고 얘기했어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약혼을 취소해줬으면 한다고 전했죠.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고. …… 그 보고를 하고 싶었어요, 오늘.”

그녀도 사랑한다고 했다.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앞선 인연을 버리고 새로운 운명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억겁의 세월이 만든 운명, 인연인가 보다. 하지만 또 다른 운명이 둘 사이에 끼어든다. 운명의 훼방꾼.  

그런데 이 긴 침묵이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몰고 왔다. 시선을 떨군 채 침묵하던 요코가 다시 눈을 드는 것을 계기로 사나에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코 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단지 요코 씨와의 관계가 시작된 뒤로 마키노 씨는 자신의 음악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요코 씨를 속인 것은…… 요코 씨에게는 자기만의 멋진 인생이 있잖아요? 하지만 내 인생은 마키노 씨를 빼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

사랑으로 사랑을 갚았다. 사랑이 사랑을 배신했다. 요코는 과거로 돌아간다. 리처드 그리고 켄.  
정말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모든 것이 인연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요코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하지만 결국 상대를 한 번도 나무라는 일 없이 그녀는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고된 이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키노는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코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도 완벽히 규율됐던 세계와 다르게 이제는 오히려 음악 자체를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그것을 지켜보다가 중요한 지점에서 단숨에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듯한 선명한 솜씨가 있었다. 그것 또한 오랜 ‘슬럼프’ 끝에 그에게 생겨난 하나의 변화였다. 

“그럼 오늘 이 마티네의 끝에 다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요코는 그때서야 희미하게 웃음이 감돌던 뺨을 파르르 떨며 숨을 죽였다. 마키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을 위해(for you) 라는 말이 사실은 단지 '당신을 위해(for you)’ 라는 뜻이라는 것을 전하려는 듯이 슬쩍 턱을 끄덕인 다음에 의자에 앉았다. 

운명 같이 찾아 온 사랑, 그리고 운명처럼 사라진 사랑.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  
가슴 떨리는 사랑이라고 해도 잊음과 버림에 익숙한 우리가 함부로 운명이니 인연이니 말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랑이라는 떨림을, 영원이라는 약속을, 함께하자는 맹세를 포기하겠는가! 


아무리 운명이라고 해도 가슴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6월 16, 2017

병사(病死)에서 외인사(外因死)로

어제 서울대병원이 백남기 선생 사인(死因)을 병사에서 외인사로 변경, 발표했다. 오늘은 이철성 경찰청장이 직접 사과했다. 
고인은 억울하게 가셨지만 지금이라도 사인을 변경한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죽음에 다소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또한 물대포 책임자인 경찰청장의 사과 역시 이후 이 사고를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사인을 변경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이 죽은 이유도 바뀌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사과는 진정성도 중요하지만 그 타이밍 또한 매우 중요하다. 고인이 사망한 지 거의 일 년이 다 된 지금에 와서 사과를 한다는 것은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고 진정어린 사과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만약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들이 사과를 했을지 의심스럽다. 아마 절대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왜 사인을 변경, 발표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만약 의사가 사실관계를 왜곡했다면, 그것도 특정 목적을 위해 고의로 그런 일을 했다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살얼음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환자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사람 목숨을 왜곡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천벌을 받을 것이고, 온국민이 이해하지 않을 것이며 고인과 유가족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공권력은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국민을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 속에서 피치 못한 이유로 국민이 사망했다면 국가가 정중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합리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맞다. 누구를 위한 국가이고 누구를 위한 권력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종환 문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 자리에서 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알베르 카뮈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6월 13, 2017

me before you

생명은 있지만 삶은 없다. 
사지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다면, 말하고 숨 쉬는 것 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과연 그런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무슨 수로 극복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현대 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전신불수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그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힘이 될까? 윌리엄 트레이너는 그래서 죽음을 선택한다. 존엄사!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어머니.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에요. 회복될 가망은 없으니까,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끝내달라는 부탁은 철저히 합리적인란 말입니다. 

아무리 생명이 고귀하고 함부로 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생명 자체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온몸을 옥죄는 고통, 온 정신을 삼키는 좌절과 공포, 절대 끝나지 않을 시베리아 횡단철도 같은 긴 외로움. 장마로 쓰러진 볏단 같은 처절함. 겨울 산 속 짐승 같은 깊은 고독과 절망. 
스스로 생명을 포기해야만 하는 자들의 좌절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리고 이런 거 알아요? 아무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아무도 두렵다든가, 아프다든가, 무슨 멍청하고 뜬금없는 감염으로 죽게 될까봐 무섭다는 얘기는 원치 않아요…….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휠체어에 이렇게 앉아 있다보면 가끔 죽도록 답답해져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고 싶어진다는 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죽을 권리, 스스로 생명을 포기할 권리, 과연 이는 정당한 권리일까? 이를 타인이 말리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누구에게 스스로 죽을 권리가 주어지는가? 누가 이들의 죽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가?   

“…… 난 여기서 끝내야만 해요. 더는 휠체어도 싫고, 폐렴도 싫고, 타는 듯한 다리도 싫습니다. 통증이나 피로감도, 아침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잠을 깨는 것도 이젠 싫어요. 우리가 돌아가면, 난 스위스로 갈 겁니다. ……”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거미줄 같은 숨만 쉴 수 있는 몸만 가지고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삶은 내게 인생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의지하고 살까? 그 의지를 누가 받아 줄까? 며칠이나, 몇 달이나, 몇 년이나 받아 줄까?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자, 어떤 위로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타인에게는 희망을 주려고 한다. 자기 삶은 포기하면서 타인 삶은 충만하게 만들려고 한다.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관용과 여유, 이런 패러독스가 또 없다. 
윌은 간병인 루이자 클라크에게 되려 희망을 주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 자신이 다 살지 못한 인생을, 자신처럼 살지 않도록,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배려했던 루이자에게 참 인생을 살도록 오히려 희망을 준다.  

“당신한테 기회를 주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당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이제야 간신히 자기 자신의 잠재성을 깨닫기 시작한 어떤 사람. 그게 날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당신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겁니다.”

“엄마? 내가 윌한테 진 빚이 있어요. 그 빚을 갚으려면 가야만 해요. 누구 때문에 내가 대학에 지원했다고 생각하세요? 누가 내 인생에서 의미를 찾도록, 세상 밖으로 여행을 떠나도록, 야심을 갖도록 용기를 줬다고 생각하세요? 모든 걸 바라보는 내 생각을 바꿔놓은 사람이 누구 같아요? …… 다 윌 덕분이라고요. 저는 내 평생의 27년 세월보다 지난 6개월 동안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스위스에 와달라고 하면, 그래요, 난 갈 거에요. 결과가 어떻든.”

나는 맑고 파란 스위스의 하늘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두 사람, 처음엔 서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두 사람, 하지만 결국은 온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이 함께 했던 모험들, 그들이 갔던 장소들, 그리고 내가 꿈도 꾸어보지 못했지만 결국 보게 되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짜릿하게 전류가 통하는 하늘과 형광빛으로 빛나는 바다와 웃음소리와 어리석은 농담들로 가득했던 밤들을 그에게 그려주었다. 그를 위한 세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작가는 존엄사를 선택한 윌리엄 트레이너와 간병인 루이자 클라크를 통해 진솔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어떨 땐 가족보다 남이 훨씬 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마음 붙일 곳 없던 사람이 좋은 친구를 만나 드디어 모든 것을 편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송곳 하나 찌를 곳 만큼 여유도 없는 우리에게 인생을 크게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6월 11, 2017

눈먼 자들의 도시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마음속에 늘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인간이 성인군자처럼 살 수도 없고 그럴 필요 역시 없겠지만, 인간이라면 어떤 가치와 어떤 윤리의식을 가지고 살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답변을 마음속에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 눈이 멀었나, 생각해 보니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저 그런 평범한 인생을 살아서 눈이 멀 정도로 뭘 해본 적도 없다. 또 미친듯 눈이 멀어서 어떤 결과물을 완성한 것 역시 없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나쁜 의미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인생에서 눈 한번 멀어보지 못했다면 밋밋한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눈이 멀었다라는 것은 물리적인 시각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모두 눈먼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는 세상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내가 믿는 진실은 정말 진실일까? 
눈먼 자들 중에 눈먼 자.

사리사욕에 눈먼 사람, 돈에 눈먼 사람부터 온갖 잡다한 것에 눈먼 사람 투성이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눈이 멀었다고 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만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도 분명 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지 못한다는 뜻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것만 본다는 의미도 있다.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해서 눈먼 자, 어떤 특정한 것만 봐서 눈먼 자.
눈이 멀어서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었을까? 눈이 멀어서 이만큼 각박해진 걸까? 


만일 이것이 실인증이라면, 환자는 지금 그가 늘 보던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즉 시력 감소는 없는 것이고, 다만 의자를 보는데도 뇌가 의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시신경에 오는 빛의 자극에는 계속 정확하게 반응을 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알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며, 나아가서 그것을 표현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어떤 남자가 차 안에서 신호 대기 중에 느닷없이 눈이 멀게 된다. 그는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그를 대신해 차를 몰고 집까지 데려다 준다. 이어 그의 아내가 눈이 멀고 대신 운전해 준 그 남자도 눈이 먼다. 또 처음 눈이 먼 자가 찾아간 안과 의사와 당시 안과에 대기 중이던 모든 사람이 눈이 먼다. 마치 전염병처럼 눈먼 사람이 늘어가고……

이윽고 남자가 말했다, 난 눈이 멀었어, 앞이 안 보여. 여자는 다시 짜증이 났다. 말도 안 되는 장난 좀 그만 해요, 농담할 게 따로 있지. 나도 농담이면 좋겠어, 하지만 정말로 눈이 멀었단 말이야, 아무것도 안 보여. …… 여기요, 불도 켜놨잖아요. 나도 당신이 거기 있다는 건 알아, 소리도 들려, 만질 수도 있어, …… 하지만 안 보인단 말이야. 여자는 울면서 남편에게 매달렸다. 

결국 정부 당국에서는 눈먼 자와 보균자를 정신병원에 격리시키고 만다. 눈먼 자만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그 안에서 갖은 고초를 겪게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된다. 눈먼 자끼리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눈먼 자들 중에 다시 눈먼 자가 생긴다. 
이들 중 오직 눈멀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바로 안과 의사 아내다. 이야기는 안과 의사 아내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의사 아내는 그곳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그런 행동이 경멸스럽고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볼 권리가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눈먼 자들이 수용된 정신병원은 그야말로 엉망이다. 이는 우리 사회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무질서와 무법천지.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이 지켜야할 윤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연대의식이 말살되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사는 세상을 통해 현재 위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저 사람은 누구요.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가 대답했다, 의사입니다, 안과 의사죠. 택시 운전사가 말을 받았다. 그거 재미있군, 아무것도 못해 주는 의사라, 우린 정말 운도 없지. 아무데도 데려다주지 못하는 택시 운전사는 뭐가 다른데요,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가 맞받아 빈정거렸다. 

눈먼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가 안과 의사라니, 그가 택시 운전사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눈이 멀면, 즉 세상을 오롯이 볼 수 없는 사람은 어쩌면 사회에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수치심이 우리에게 먹을 걸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그 말은 맞소, 늘 수치심이 없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자들이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이제 우리에게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이곳에서,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해야 하고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을 위해야 마땅한 이곳에서, 우리는 강한 사람들이 잔인하게도 약한 사람들 입에 들어갈 빵을 빼앗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눈먼 자들은 수치심을 모른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 어떤 수치심도 감내한다. 어려울수록 연대해서 스스로를 통제하며 공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건만, 짐승 같은 정신병원 속 눈먼 사람들은 저 하나 살기 바쁘다. 

그들은 정신병원이라고 정의된 곳에서 살았다. 사실, 그 합리적인 미로에서 사는 것과 도시라는 미쳐버린 미로로 나아가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안내하는 손길이나 개줄도 없다. 도시의 미로에서는 기억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이미 정신병원일지도 모른다. 
합리적 연대와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고 삶을 돌아보고 가치를 판단할 여유가 필요하다. 타인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겸양을 쌓아야 한다. 눈먼 자에게 눈먼 자로 맞서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눈먼 자가 있다면 따뜻하게 손을 잡아줄 필요가 있고, 눈먼 자는 또다른 눈먼 자를 안아 줄 필요가 있다. 

안과 의사 아내가 한 말을 기억하자.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6월 07, 2017

리스본행 야간열차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그 자체 외에 아무 것도 모를 수 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면 여타 동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내가 원했던 삶을 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정확하게 보고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보고 있을까? 내가 하는 말은 공허하지 않은가? 이름 석 자는 나를 얼만큼 표현해 주고 있을까? 얼굴 표정은 나를 어떻게 말해 주고 있을까? 누가 나에게 ‘나’다움을 지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무척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확신하는 것이 우리 세계 중 지극히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모르는 자신, 알려고 하지 않는 자신,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신.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볼 때, 타인을 평가할 때 공정한 잣대를 가지기는 그래서 힘들다. 아니 사실 상 불가능하다. 

말과 글로써 자신은 표현되고 드러난다. 하여 말과 글은 곧 자신이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말하고 쓰는 글은 대부분 매우 제한적이다. 제한된 말과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 남을 평가하게 된다. 우리 생이 일백 페이지라면 평생 겨우 몇 페이지만 채울 뿐이며 그마저도 공허할 뿐이다. 타인이 쓴 글을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면 자기 내면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 안다는 경솔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말이 맞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 라는 책을 읽게 된다. 아주 우연히.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레고리우스는 서점 주인이 번역해 준 책 서문을 듣고, 단지 서문 몇 문장만 듣고서 엄청난 격정을 느낀다. 평생 고전문헌학자로서 살아온 그레고리우스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흔든 아마데우를 만나기 위해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어떤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저자를 찾아가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어떤 감동을 받았기에 주저 없이 스위스 베른에서 리스본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레고리우스가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데우? 자신? 실존? 존재?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無)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는 아닌지.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통해서 나와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과 글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일까? 누가 나에 대해 말할 때, 내가 그에 대해 말할 때,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내 생각은 여전히 똑같은가? 그렇다면 내 생각이 틀린 것인가? 상대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변한 것인가? 모두가 변한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시점에 우리가 진정 우리인가? 그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할 때, 이 말이 효과가 있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을까? 우리를 스치고 흘러가는 생각과 상(像)과 느낌의 강물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 강물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자신의 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말을 쓸어내고 지워버린다. 혹시 남겨둔다면 기적이다. 나는 다른가? 내 마음의 강물이 방향을 바꿀 정도로 다른 사람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하는 것. ……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악(惡)이 있어 선(善)을 알고 약(弱)이 있어 강(强)을 알 수 있듯이, 실망이 있어 만족을 알 수 있다. 네가 있어 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있어 ‘함께’ 소주 한잔 마실 수 있다. 네가 없다면 누가 내 이름을 불러 줄 것인가? 네 덕에 내가 산다. 네 존재는 내게 큰 기쁨이다. 네 존재는 내 삶을 가치 있게 한다. 

황량한 벌판에 꽃 한 송이 있다한들 그 이름을 불러줄 이 없으면 무슨 소용 있으랴!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 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난 흥분했다. 덜컥거리는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이 기차에서 절대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기차의 궤도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속도도 정할 수 없다는 것. 기차가 보이지도 않고, 누가 기차를 운전하는지, 기관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 없다. ……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끊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 내 존재에 대한 성찰, 타인과 관계하는 삶. 책은 차분하면서도 따분하지 않게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같은 제목 영화가 있지만, 책만큼 세밀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또한 책 내용과 영화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다. 각색 과정에서 영화다운 이야기를 넣은 듯하다. 책을 길지만 영화는 짧다.  책을 다 읽고 영화를 보면 더 큰 감동이 올 것이다.  

6월 02, 2017

어떤 가방

오늘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후보자 청문회가 있었다. 
김상조 후보자가 청문회장에 들고 온 가방이 종일 소셜미디어에서 회자됐다. 


[이미지 출처 : 민중의 소리 웹페이지]

가방을 보니 최소 10년 이상은 사용한 것 같고, 가방 값을 몇 번은 뽑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울대학교 학사, 석사, 박사 출신이고 대학교수를 오래 했기 때문에 좋은 가방 하나 사는 게 흠일 리 없었을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가방인지 모르겠으나 가방에 이분 성품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듯하다. 이분이 살아온 수십 년 발자취가 그대로 가방에 녹아든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황소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지식인의 깊은 고뇌가 무거운 납처럼 덮여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사람으로 치면 평생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백발이 된, 참 곱게 늙은 분 같다.
가방을 열면 낙엽이 타는 냄새가 날 것 같기도 하고 헌책방 먼지 냄새가 올라올 것 같기도 하며,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서류뭉치가 나올 것 같기도 하다. 

품성이 가방을 말해 주지는 못 해도, 가방이 품성을 말해 줄 수는 있을 듯하다. 낡은 것을 오래 사용하는 사람 품성이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방 하나만 보더라도 후보자 내공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늘 청바지에 검정색 터틀넥 셔츠를 입던 스티브 잡스가, 수수한 복장을 하는 독일 메르켈 총리가, 해진 코트를 입은 채 비행기에서 내리던 권양숙 여사가 생각났다. 연간 의상비로 수천만 원을 썼다는 그녀도 생각났다. 

후보자가 아주 비싼 명품 가방을 가지고 나왔더라면 언론은, 청문위원은 뭐라고 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얼만큼 다를까? 내가 생각하는 상대와 그 상대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은 또 얼만큼 다를까? 
우리가 상대를 평가할 때 그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있는 그대로 볼 줄을 알기는 하는 것일까? 
우리 마음대로 정한 잣대 속에 상대를 가두고 강제로 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손잡이가 심하게 낡은 것은 당연할 터였다. 

이분 걸음걸이마다 저 가방이 함께 했을 것이고, 들고 날 때 늘 저 가방이 함께 했을 것이다. 가방을 보니 가방 무게와 더불어 이분 가슴속 무게도 절절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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