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 2017

묵호항

동해고속도로 망상IC를 빠져 나와 시내 쪽으로 우회전해서 십 분 정도 차를 달리면 묵호항이 나온다. 묵호항에는 생선 냄새와 바다 냄새가 합쳐진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나는 그 냄새가 좋다. 메슥거리는 비린내를 한참 덜어낸, 기분 좋은 비릿함이다. 들큼하고 달곰한 것에 사람 냄새까지 더해지니 마치 품속처럼 아늑하다



괴괴한 밤에 바닷가로 나가면 수평선 멀리 엄청난 빛을 뿜는 배가 복달거리며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오징어잡이 배다. 마음 같아선 그 배에 한번 타보고 싶기도 하지만 태워 줄 리 만무하다. 만선을 위해 새벽잠 설치며 파도에 맞서 고기 잡는 이들의 팥죽 같은 땀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자음 ‘ㅅ’ 같은 테트라포드가 도열해 있는 방파제 끝에는 붉은색 등대가 우두머리처럼 우뚝 서있다. 등대 맨 꼭대기에는 갈매기떼가 망원경도 없이 동해바다를 시찰하고 있다. 거대한 테트라포드는 ‘쏴아쏴아’하는 파도 소리가 방파제에 부딪혀 자음 ‘ㅅ’만 남은 것 같은 모양새다.  켜켜이 쌓여 있는 테트라포드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듯 보이고 그 벽면을 따라 개미만큼 작은 게들이 행군을 하기도 한다. 이 게들에게 테트라포드는 만리장성과 다름없다. 이놈들이 테트라포드를 보고 훈민정음을 깨닫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저 거대하고 많은 테트라포드를 어떻게 옮겼고 저렇게 마침맞게 쌓았는지 참 모를 일이다. 
방파제 옆을 돌면 바닷가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바짓단을 걷고 찬물에 발을 담그면 노곤했던 몸이 그 선득함에 화들짝 놀라 천년 묵은 피로도 히뜩 사라진다.  욕심에 조금 깊은 곳으로 발을 내딛다 보면 어느새 파도가 무릎까지 차올라 빨랫감이 늘어난다. 

묵호항 바로 옆에는 횟감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여럿 모여 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어판장이라고 한다. 어판장 한쪽에는 아주머니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어판장에서 산 횟감을 즉석에서 먹기 좋게 떠준다. 그런 냄새가 모여서 비릿한 추억이 된다. 바다 냄새, 사람 냄새, 인생 냄새. 냄새만으로 이미 자연산 회를 한 접시 먹은 듯하다.  

어판장 앞에는 건어물을 파는 노점상이 여럿 있고, 그 와중에 호박엿을 파는, 틈새시장을 노리는 아저씨도 있다. 가윗소리가 어찌나 경쾌한지 안 사곤 못 배긴다. 울릉도 호박엿이라고 하는데 굳이 브랜드 마케팅을 안 해도 맛이 좋다. 그 동네 사람들이 ‘피데기’라고 하는 반건조오징어는 그 맛이 참 기막히다. 딱딱하지 않아서 씹기 편할 뿐더러 성냥개비 같은 초고추장을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 동해바다를 통째로 삼킨 듯하다. 

배가 정박해 있는 묵호항 근처를 어정버정 하다 보면 낚시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비트적비트적 걸으면서 뽕짝을 한가락 하는 아저씨를 만나기도 한다. 어렵사리 고기가 낚이는데 대부분 작은 고기다. 보고 있으면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 생각도 나고 인생이 뭐 별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묵호항 건너편에 조그만 시장이 있고 시장 어귀에서 건어물을 파는 할머니가 계신다. 처가에 갈 때면 그 앞을 지나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유찬이 왔나!” 하시면서 우리 아들에게 만 원짜리를 덥석 쥐어 주신다. 일년에 한두 번 겨우 방문하는데 어떻게 아들 놈 이름을 기억하시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오만 원권이 생기면서 아들 수입이 다섯 배로 늘었다. 누구에게 감사할지 몰라 난 우선 조폐공사 사장님을 떠올렸다. 그 돈 모아서 녀석은 자전거 사는 데 보탰고 컴퓨터 사는 데 보탰다. 

시장 반대편 끝에 은성목욕탕이라고 있다. 목욕탕 입구 옆에 마치 붙박이장 같은 개집이 있고 그 안에 사나운 개가 있는데 내가 개띠인 걸 아는지 나를 보면 엄청나게 짖어댄다. 그때마다 난 “네가 ‘개’라서 여태 살아 있는 거야. ‘게’였다면 넌 벌써 내 밥이 됐다.” 라고 말하며 더 짖기 전에 조심스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다. 
목욕탕 안에는 열탕, 온탕, 냉탕이 각 하나씩 있고 그 유명하다는 핀란드식 증기 사우나도 있다. 한켠에 신기한 물건이 있는데 이른바 자동 때밀이다. 둥근 접시 모양에다 까칠한 때수건을 입힌, 장영실도 울고 갈 세계적인 발명품이다. 대야에 찬물 한가득 담아서 접시에 흩뿌린 후 등을 기대면 접시가 돌면서 시원하게 때를 민다. 대중화가 안 된 걸 보면 그리 성공적인 발명품은 아닌 것 같다. 하여 장영실은 의문의 일 패를 벗어났다.  

그 시골 작은 항구도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는 제법 차가 막힌다. 검정색 비닐 봉다리에 든, 갓 손질한 횟감을 바투 잡고서 차에 오르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행복이 묻어난다. 얼마 전에 가보니 그 방파제 옆에 구식 횟집을 정리하고 깔끔한 새 건물을 올렸는데 왠지 어색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다림질한 듯 말쑥한 횟집이 시골 항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이러구러 하루가 지나는 묵호항에는 늘 ‘오도독 오도독’ 회 씹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께느른한 몸을 이끌어 서울로 돌아오면 묵호항 냄새가 며칠 동안 떠나지 않는다. 여느 시골처럼 묵호항에도 젊은이는 보이지 않고 노인들뿐인데 내 머릿속 그 풍경이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다. 묵호항에서 태어난 아내와 99년에 결혼했고 매년 한두 번 갔으니 아마도 삼사십 번은 간 모양이다. 

세상 싫을 땐 거기 가서 혼자 아무 생각 없이 며칠 묵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6월 24, 2017

두 남자와 자전거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 녀석은 정리정돈 안 하고 어지럽히기 대마왕이다. 양말은 저쪽에 팬티는 이쪽에. 책상 위는 과자 봉지, 책, 노트, 볼펜 등으로 늘 엉망이다. 사실 대마왕까지는 아니고 그 또래에 다 그런 정도. 하여튼. 

녀석에게 자전거를 한 대 사주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자전거는 늘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자전거에 대한 욕심이 커져 갔고 좋은 자전거로 기변을 노리고 있었다. 좋은 자전거란 곧 비싼 자전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들 놈 친구 아빠가 마침 삼천리자전거 본사에 근무하는 분이라서 기존에 타던 자전거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었다. 집사람은 다시 그분에게 부탁하자고 했지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던 참이었다. 또한 녀석이 원하는, 사고 싶은 자전거는 따로 있었다. 

나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는데 자전거로 유명한 동네였다. 동네방네 자전거 없는 집이 없고 등하교 시간 아스팔트에는 마치 피난민 같은 자전거 행렬로 가득했다. 아마 전국에서 가장 먼저 자전거 도로가 생긴 동네일 것이다. 지금은 자전거박물관도 있다. 그래서 자전거에 익숙하지만 나는 자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 자전거를 한 번도 가진 적 없다. 

녀석에게 자전거를 사주기로 하고 어떤 자전거를 원하는지 물었더니 글쎄 인터넷 쇼핑몰에서 몇 가지 고른 후 링크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보니까 팔십만 원이 넘는 것도 있고 제일 싼 게, 그러니까 자기 딴에 제일 후순위였던, 오십만 원 정도였다. 물론 엄청나게 비싼 자전거가 많은 걸 안다.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자전거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녀석에게 백만 원 가까운 자전거를 사주기는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녀석이 휴대전화 액정을 깨먹었다. 벌써 몇 번짼지. 수리비가 15만 원 정도 나왔는데 너무 화가 나서, 액정 깨진 것 자체보다 조심성 없는 것 때문에 화가 났다, 벌로 올해 자전거 사주기로 한 것은 취소라고 말했다. 녀석은 별말은 없었지만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며칠이 지나 하도 마음에 걸려서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고 제일 후순위인 50만 원 정도하는 자전거를 주문했다. 그 자전거가 주문 삼일만인 그제 집으로 배달이 됐다. 요즘은 자전거가 완전 조립 상태로 배송이 된다. 집에서 간단하게 페달만 달면 바로 탈 수 있도록.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녀석이 거실 바닥에 자전거를 거꾸로 눕혀 두고 여기저기 물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천방지축 중1이 자전거를 닦고 있다니. 사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하고 모처럼 외식을 하고 집에 왔는데 녀석이 크로스백을 주섬주섬 하더니 잠시 동네 공원에 갔다 오겠다고 한다. 크로스백을 열어 보니 온갖 공구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딴에 스스로 정비를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현관문 앞에 이전에 타던 자전거가 아직 있는데 그걸 보면서 녀석이 껄껄 웃는다. 마치 이런 똥 같은 것을 어떻게 타고 다녔는지 한심하다는 듯이 말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쓰는 맥북 프로는 이백만 원짜리고, 아이폰은 백만 원 언저리에 샀다. 타는 차는 약 6년 전에 이천오백만 원을 주고 산 것이다. 아이에게 그 정도 자전거를 사주지 않을 명분은 내게 없었다. 

아이 휴대폰을 구매하면서 분실, 파손보험을 들었는데 보험료가 입금이 되어서 사실상 액정 수리비는 별로 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아이한테 하지 않았다. 
50만 원짜리 자전거를 주문하고 나서 애하고 굳게 약속을 했다. 
“엄마한테는 30만 원에 샀다고 말해.”



내 막냇동생은 6년간 암 투병 끝에 2014년에 죽었는데, 암 수술 후 운동할 요량으로 자전거를 탔었다. 
한 이백만 원 정도 하는 자전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열심히 탔다. 아침 먹고 자전거, 점심 먹고 자전거, 저녁 먹고 자전거였다. 자전거 동호회도 들었고 들로 산으로 매일 자전거 타는 게 일이었다. 매일 그렇게 3, 4년을 탔다. 살아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 죽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동생은 결국 재발 및 전이로 죽었다. 

죽기 몇 달 전 동생이 카톡으로 자기가 타던 자전거 사진 여러 장을 보내왔다. 휴대폰 카메라로 곱게도 찍어 보냈다. 앞 사진, 옆 사진, 뒷 사진 등 골고루 꼼꼼하게 찍어 보냈다. 어디서 찾았는지  말끔한 곳을 배경으로 바윗등 같은 곳 위에 자전거를 얹어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타던 자전거를 중고나라 같은 데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뭔지 그때 깨달았다. 동생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도저히 그 자전거를 중고나라에 올릴 수 없었다. 
카톡에 이런 메시지가 함께 있었다. 
“형 미안해. 자전거 판 돈으로 형 용돈이나 해."

동생이 죽은 후 카카오 스토리를 살펴봤더니 사진과 글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늘로 가기 전에 미리 다 지운 것이다. 왜 지웠을까 궁금했지만 때가 늦어 물어볼 수 없었다. 그 고독했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현생을 모조리 지우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다.  
동생 카스에는 다만 딱 한 장 사진이 남아 있었다. 프로필 사진이었다. 


동부간선도로와 나란히 중랑천변으로 자전거 도로가 있는데 출퇴근길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저 사람들은 건강할까? 뭐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자전거를 탈까 생각하곤 한다.  
자전거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 그게 무엇이든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동생이 타던 자전거를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 옆에 뒀어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지금 그 자전거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다.   

6월 19, 2017

마티네의 끝에서

흔히, 운명이라고 하고 인연이라고도 한다. 
운명이라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인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여 우리는 운명이나 인연이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된다. 운명과 인연이 늘 해바라기처럼 웃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반대로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이 운명과 인연을 바뀌게 하는 수레바퀴일 수도 있다. 바뀐 후나 바뀌기 전이나 모두 운명인 건 마찬가지다. 갈림길에서 한쪽을 택하는 경우 나머지 한쪽은 버려야 한다. 양쪽 모두를 택할 수는 없다. 세월이 흘러, 그때 택하지 않은 다른 한쪽을 택한다 해도 이미 그건 과거일 뿐이고 새로 선택한 한쪽은 전혀 다른 미래가 된다. 어느 순간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미래와 과거가 바뀌게 된다. 때론 타인이 개입해서, 자기 선택과 무관하게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운명과 인연이 겹쳐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과정, 사랑. 
가슴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이 있어도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싹트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순 없으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를 공유하기까지 운명과 인연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곁에 없습니다. 어느날 미래에서 그녀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은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있다면, 인연이 있다면 그녀를 반드시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운명이라 해도 미리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우리는 영원을 약속하게 된다.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그저 언어로만 서로를 알아왔던 두 사람은 이제 몸이 더해져 서로를 바라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두사람이 되었다. 이미 까마득히 앞서가서 거의 상대와 녹아들기 직전까지 흥분했던 자신들의 언어를 좇아가려 했지만 그 진지함과 다양한 애정의 암시에도 갑작스럽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다. 

운명을 믿고, 인연을 믿고 사랑을 약속하지만 운명과 인연 사이에 타인이 끼어든다. 심장을 도려내는 간섭. 
만약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한다면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운명과 인연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온다. 이제 이전 사랑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운명과 인연이 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운명과 인연 역시 또다시 또 다른 운명과 인연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운명과 인연은 돌고 돈다. 때문에 사랑도 돌고 돈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느끼지 못하는 공기처럼, 투명한 물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미래에서 온 사랑은 현재 사랑을 파괴한다.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랑을 지워야 한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 묻어야 한다. 과거 속에 묻은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다. 미래가 과거를 바꾼 것이다. 사랑이란 미래로 향하는 약속이다. 하여 과거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힌다. 이끌림에 이끌려 새로운 사랑이 미래에서 찾아 온다. 

“지구 어딘가에서 요코 씨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죽을 거예요.”

“요코 씨가 자살한다면 나도 할 거예요. 이건 나만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온다면 그건 나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해줘요.”

이미 약혼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마키노. 
그리고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요코
요코와 약혼한 남자, 리처드.
마키노를 빼앗으려는 여자, 미타니 

“나, 이제 곧 결혼해요.”
“그러니까 내가 그걸 막으러 왔죠.”

“어렵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만나버렸잖아요? 그 사실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요. 고미네 요코라는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생이라는 건 나한테는 이미 비현실적이에요. 내가 살아 있는 이 현실에는 요코 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내 곁에 계속 존재해줬으면 좋겠어요. 날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소나기처럼 갑자기 새로운 사랑이 찾아 왔지만 그 사랑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은 감정이다. 형태가 없어서 취하기 어렵다. 그래서 말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키노 씨가 마드리드에 가 있는 동안에 그 사람하고 얘기했어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약혼을 취소해줬으면 한다고 전했죠.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고. …… 그 보고를 하고 싶었어요, 오늘.”

그녀도 사랑한다고 했다.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앞선 인연을 버리고 새로운 운명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은 억겁의 세월이 만든 운명, 인연인가 보다. 하지만 또 다른 운명이 둘 사이에 끼어든다. 운명의 훼방꾼.  

그런데 이 긴 침묵이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몰고 왔다. 시선을 떨군 채 침묵하던 요코가 다시 눈을 드는 것을 계기로 사나에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이렇게 말했다. “요코 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단지 요코 씨와의 관계가 시작된 뒤로 마키노 씨는 자신의 음악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요코 씨를 속인 것은…… 요코 씨에게는 자기만의 멋진 인생이 있잖아요? 하지만 내 인생은 마키노 씨를 빼앗기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

사랑으로 사랑을 갚았다. 사랑이 사랑을 배신했다. 요코는 과거로 돌아간다. 리처드 그리고 켄.  
정말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모든 것이 인연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요코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하지만 결국 상대를 한 번도 나무라는 일 없이 그녀는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고된 이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키노는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코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도 완벽히 규율됐던 세계와 다르게 이제는 오히려 음악 자체를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그것을 지켜보다가 중요한 지점에서 단숨에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듯한 선명한 솜씨가 있었다. 그것 또한 오랜 ‘슬럼프’ 끝에 그에게 생겨난 하나의 변화였다. 

“그럼 오늘 이 마티네의 끝에 다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요코는 그때서야 희미하게 웃음이 감돌던 뺨을 파르르 떨며 숨을 죽였다. 마키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을 위해(for you) 라는 말이 사실은 단지 '당신을 위해(for you)’ 라는 뜻이라는 것을 전하려는 듯이 슬쩍 턱을 끄덕인 다음에 의자에 앉았다. 

운명 같이 찾아 온 사랑, 그리고 운명처럼 사라진 사랑.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  
가슴 떨리는 사랑이라고 해도 잊음과 버림에 익숙한 우리가 함부로 운명이니 인연이니 말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랑이라는 떨림을, 영원이라는 약속을, 함께하자는 맹세를 포기하겠는가! 


아무리 운명이라고 해도 가슴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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