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 2017

양과 강철의 숲

‘의사소통’, 사람 마음을 알아 가는 방법이다. 서로서로 마음을 조율하며 산다면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에겐 이런 ‘나’, ‘그녀'에겐 저런 ‘나’. 상대방 마음에 따라 자신을 조율하면 좋지 않을까? 피아노를 조율하듯 나를 조율하면 난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취향 문제야. 피아노에 어떤 소리를 추구하는가, 그건 고객 취향에 달렸어.”

“기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일단은 의사소통이야. 되도록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그 이미지를 제대로 확인해야 해.”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피아노를 조율할 때, 피아노 주인이 원하는 감정을 조율에 실어야 한다. 조율에는 각각 감정이 이입되고 따라서 모든 피아노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피아노도 저마다 혼을 가지고 주인을 닮은 소리를 낸다. 아무리 비싼 악기라도 주인이 고약하면 녀석도 고약한 소리를 내고, 주인이 따뜻하면 녀석 역시 따뜻한 체온을 가지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짧은 이메일도 쓴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글에도 영혼이 실린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고 역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내 혼이 실린, 내 냄새가 밴, 내 숨결이 흐르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기억 속에는 수만 가지 소리가 있다. 거꾸로, 소리 속에도 수만 가지 기억이 있다. 기억은 추억이고 향수다. 기억은 모두 과거이고 미래에 대한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그 기억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잊혀진 소리, 어릴 적 뛰어 놀던 시골, 쪼그려 먹던 뽑기 같은 것, 물장구치던 개울가 같은 곳. 기억은 추억, 그리움을 재생시킨다. 솜이불이 물먹듯이 푹 빠져 든다. 

“물론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 중점을 둘 것인지, 기존 소리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좋아하는 음색을 찾을 것인지요.”

“원래 갖고 있던 소리라는 게 문제야. 고객 기억 속에 있는 소리보다 기억 그 자체가 소중하지 않을까? 어린 딸이 피아노를 연주하던 행복한 기억."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 눈에 맞추는 것, 이런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선 정상에서 환호를 받는 것만 좋은 것일까?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우리 목표는 한결같이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최정상에 서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데, 목표는 한곳을 향한다. 병목 구간에서 한꺼번에 만나게 되면, 90%는 뒤엉켜 쓰러지고 다치게 된다. 

숲에는 지름길이 없다.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종종 갈망한다. 기적의 귀를, 기적의 손가락을 내가 갖고 있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꽃피지 않을까. 머릿속에 그린 피아노 소리를 당장 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내가 목표로 하는 지점은 저 먼 곳에 있는 그 숲이다. 그곳까지 한달음에 갈 수만 있다면. 

무리 속에 있으면 자신도 마치 무리처럼 느껴진다. 확대해 보면 무리 속에 수많은 것이 존재한다. 무리는 스스로 무리가 아니고 작은 존재가 모여 커다란 무리가 된 것이다. 누구나 무리 속 작은 존재일 뿐이며 무리 자체가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한 점일 뿐이고 따라서 공평한 존재다. 무리 속 작은 존재, 그것이 우리가 있을 자리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무리, 그것이 우리가 꿈꿀 자리다. 

산이라고 생각했던 대상 안에 사실은 수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흙이 있고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르고 풀이 자라고 동물이 있고 바람이 분다. 

아무도 조율사의 실력 따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피아니스트가 절찬을 받더라도 피아니스트의 공로도 아니다. 음악의 공로이다. 

용기를 내야 할 것 같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공이 있다면 그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자만하지 말고, 특정인에게 가려진다고 실망하지 말자. 누구도 공은 가지고 있지 않다. 공은 이미 있었던 것뿐이다. 가치! 누구에게는 큰 가치가 누구에게는 작은 가치일 수도 있다. 큰 가치를 가진 자와 작은 가치를 가진 자가 원래 달랐던 것도 아니다. 

“왜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기로 하셨나요?”
“나는 귀가 좋았어. 내 귀는 일류 피아니스트 피아노와 내 피아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내 귀 안에서 흐르는 음색과 내 귀 밖에서 흐르는, 내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음색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어. 그 차이를 도저히 메울 수 없었지.”

가치의 기준은 일반적이지 않다. 하찮은 것과 소중한 것이 시시각각 변한다. 우리는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같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도 매일 다르다. 다름이, 같지 않음이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할 때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 
모든 사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가치 있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누군가도 필요할 것이다. 즉, 조연도, 조연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 보이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가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더 가치 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가치 있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보조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원래 가치 있는 사람이 더 가치 있을까, 아니면 그를 보조해 주는 사람이 더 가치 있을까? 알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가치 있는 사람일 뿐이다. 

“저, 역시 피아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조율사가 되고 싶어요.”
“가즈네의 피아노를 조율하고 싶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다리, 숨결, 이해, 인연. 신화가 아니더라도 기적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욕심을 죽이고 상대방 마음에 내 맘이 닿도록 조율하고 싶다. 차분히,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마음을 조율하면 다가가지 못할 상대가 있을까? 해바라기처럼 상대방 마음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싶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다소 기분이 나쁘더라도, 상대가 높은 ‘도’를 치면 나는 겸손하게 그보다 낮은 ‘라’나, ‘시’ 정도 치면 좋겠다. 

“까치들이 은하수에 다리를 만들어 준다는 설화가 있잖아요. 그렇게 피아노와 피아니스트를 이어주는 까치를 한 마리씩 여기저기에서 모아 오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말과 글로 마음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한다고 해도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정도만 표현되리라! 마음은 마음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마음이 통해야 하고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을 통해서 뿐이다. 하지만 마음은 보여 주기 어렵고 붙잡아 둘 수도 없다. 하여 시간이 흐르면,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담는 그릇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찰칵’ 사진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율은 도무라에게 부탁하고 싶어.”
“피아노는 가즈네가 칠 거야.”

“하겠습니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


8월 12, 2017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처한 환경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바늘 하나 꽃을 만큼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단 한 사람도 얘기할 상대가 없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등졌을 때를  우리는 고독하다고 한다. 고독은 그렇게 절망적인 것이다.  

왜 하필 페루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고 생각해 보니 페루만큼 어울리는 나라가 없을 듯도 하다. ‘페루’, 왠지 아득하게 느껴지고 고독이 절정에 이른 곳처럼 새겨진다. 그 먼 곳에 새들이 날아와서 줄줄이 죽어 간다. 세상의 끝, 죽음은 삶의 끝, 그래서 다시 세상의 끝, 페루!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세상 이치를 다 깨닫고 나니 공허함이 밀려든다. 사랑과 전쟁, 애정과 증오, 삶과 죽음, 어쩌면 세상은 아주 단순한 것들의 반복이다. T.S 엘리엇이 말했던가! 탄생, 섹스와 죽음이 인생의 총체라고…… 나고, 하고, 가고…… 이 한 사이클이 우리 인생이란 말인가? 덧없고 덧없어라.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여자가 여기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데, 이는 스스로에 대한 간청인지도 모르겠다. 애써 죽음을 외면하기 힘들고 이미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기억은 지문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은 건 혼자일 뿐이고…...

그녀는 그를 향해 눈을 들고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남은 눈물로 더욱 맑아진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곳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다가,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들어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리는,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아! 세상은 얼마나 고독한 곳인가?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간다. 조롱하며. 조롱하며. 조롱하며 

“지옥과 저주라네. 이보게, 지옥과 저주란 말이야. 이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군. 그녀와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세. 세상엔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머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나간 것에 대한, 얼마 안 남은 것에 대한, 고독!

마지막 자존심에 대한 고독! 


8월 10, 2017

자기 앞의 생

기뻐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슬픔 속에도 행복이 있다. 작가 에밀 아자르는 그래서 자살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슬픈 행복, 때문에 

행복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머릿속 행복은 내 것이 아니고 그저 욕심일 뿐이다. 머릿속 행복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일 뿐이다. 사람마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서 행복에 대한 정의는 즉,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앞에 보이는 것이 행복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억지로 머릿속으로 행복을 찾으려 마라.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 눈 앞에 보이지도 않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몸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삶은 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피비린내 투성이라도, 남들 눈에 하찮게 보이더라도 앞에 있는 삶이 ‘내’ 삶이다.  

로자 아줌마 집에 있는 아이들은 거의가 다 창녀의 아이들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지방에 가서 몇 달씩 머물러야 했던 그녀들이 떠나기 전후에 자기 아이들을 보러 오곤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데 왜 창녀로 등록된 여자들이 자녀를 키울 수 없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늑대와 양을 동시에 키우고 있다. 늑대는 타인 영혼을 물어뜯기도 하고, 양은 가난한 이에게 털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세상에 태어나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영혼이라는 구세주를 얻었는데 흑인이든 백인이든, 가난한 자든 부유한 자든 모두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삶을 시작한다. 영혼은 생명의 다른 이름이고, 최소한의 명예다. 살아가면서 늑대 때문에 또 양 때문에 영혼의 색깔은 변한다. 어떤 영혼은 투명하고, 어떤 영혼은 걸레처럼 더러워진다. 자기 삶에 주인이 되지 못하고 타인에게 속박되고 구속된다. 영혼은 연탄재처럼 스러지고 서서히 파멸되어 간다. 마른 낙엽처럼 피가 흐르지도 않는 혈관을 드러내 놓고 산산이 부서진다.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펀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잘 벼린 칼로 손을 그었다. 살 틈이 벌어지고 잉크 같은 피가 흘렀다. 피는 투명했고 끈적였다. 피는 소리 없이 울었다. 피는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피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애원한다. 스스로 죽지 못하는 고통, 더러워진 영혼이라고 해도 그 무게는 다르지 않다. 

로자 아줌마는 침대 밑에 히틀러의 대형 사진을 두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어떤 성인에게 의지해야 좋을지 모를 때면 그 초상화를 꺼내서 들여다보았는데, 그러면 큰 걱정거리 하나는 덜었다 싶은 생각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근심 걱정까지 금세 잊을 수가 있다고 했다. 

땅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죽는 연습을 해봤지만, 시멘트 바닥이 너무 차가워 병에 걸릴까봐 겁이 났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죽는 것이 좋을지 사는 것이 좋을지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쉽게 죽지도 못한다. 행복은 삶에서 오지만 삶에서 행복이 오지는 않는다. 삶이 고통보다 처절할 때가 더 많다.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삶은 위태롭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비록 거적대기 같은 삶일지라도 목숨은 가치 있는 것이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지내고 걱정하고 고민하고 울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행복한 것이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모모야. 나는 병원에 진짜 가고 싶지 않아. 그 사람들은 나를 고문할 거야.”
“로자 아줌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프랑스에서는 사람을 고문하지 않아요. 여긴 알제리가 아니라구요.”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놓으려 할 거다. 병원이란 데가 원래 늘 그 모양이야. 법이 그러니까. 나는 필요 이상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 더 살 필요가 없어.”

부조리가 천지에 널렸지만 탓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혼이 마르기 전에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사람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영혼에 값을 매긴다. 영혼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 영혼을 짓밟는다. 더러워져도 살아야 한다. 행복은 삶에서 오는 것이니까.  

로자 아줌마는 동물들의 세계가 인간 세계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동물들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라나. 특히 암사자의 세계가 그러하단다. …… 암사자들은 새끼를 위해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데,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며, 암사자가 새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암사자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 

삶은 미래다. 그래서 자기 ‘앞’의 생이다. 미래가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시간은 미래를 향하고, 과거를 걱정하지 않는다. 행복은 미래에서 온다. 나중에.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8월 02, 2017

편의점 인간

세상이 벽돌 공장이 된 지 오래다. 모두가 똑같이 움직이고 한 방향으로만 간다. 누구도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의사와 상관없이 갈 길은 정해져있다. 혹여 다른 길을 가려던 참이면 난데없이 비난이 쏟아지고 만다. 
무색무취, 몰개성

학교는 사람을 찍어 낸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답’이 아닌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가장 벽돌 같은 학생이 우등생이다. 벽돌에 본인 감정, 취향, 혼을 실으면 탈락이다.  
회사도 다르지 않다. 회사가 제품을 찍어 내는지 직원을 찍어 내는지 모를 일이고, 직원이 부품처럼 켜켜이 쌓여 회사가 돌아간다. 우리 모두는 사회라는 커다란 기계 속 한낱 부품이 되어 버렸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천편일률적', 이처럼 무서운 말이 또 없다. 생각도, 가치관도, 외모도, 하는 일도, 먹는 음식도 모두 똑같다. 이력서도, 모집 요강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길에서 한치도 엇나가서는 안 된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회색 동선만 끝없이 반복된다. 그래야지 성공한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망하는 첩경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매뉴얼대로 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콩나물시루에 처박힌 인생이다. 톡톡 뽑혀서 사용되는 부품이다. 부품이 고장나면 바로 다른 부품으로 교체된다. 시루에서 뽑기만 하면 된다. 고장난 부품은 얄짤없이 버려진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힁허케 지나간다.  

획일적, 일방적 가치관만 살아 남는다. 내 생각을 말하기 어렵다. 대중 생각과 거리가 있다면 그 비난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 생각과 저 생각이 부딪혀 또다른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부딪힐 생각은 꿈도 못꾼다. 남 생각이 곧 내 생각이다. 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같이 웃어주고 같이 화내주면 동질감을 느낀다. 아무 의미없는 무색투명한 동질감.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때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 

기계 속 부품과 같은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제 스스로 기계가 되지 못한다. 기계 속을 벗어나면 어지럽고 답답하여 어쩔 줄 모른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있다고 해도 타인의 비난을 감수할 만큼 명분을 찾기 어렵다.  

빨리 편의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에서는 일하는 멤버의 일원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관계없이, 같은 제복을 몸에 걸치면 모두 ‘점원’이라는 균등한 존재다.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자신을 위한 삶인가? 사회를 위한 삶인가? 
부품처럼 살다가 고장나고 녹슬면 누가 책임져 주나?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나’는 ‘나’인가, ‘부품'인가? 

이것 봐요.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 프라이버시 따위는 없습니다. 모두 얼마든지 흙발로 밀고 들어와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거나 사냥하러 가서 돈을 벌어 오거나, 둘 중 하나의 형태로 무리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이단자예요. 그래서 무리에 속한 놈들은 얼마든지 간섭하죠.”


언젠가 내가 편의점 판매대 위에 진열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진열되면 다행이다. 1+1 제품의 뒤쪽 1이 되거나 아예 폐기처분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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