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 사람 마음을 알아 가는 방법이다. 서로서로 마음을 조율하며 산다면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에겐 이런 ‘나’, ‘그녀'에겐 저런 ‘나’. 상대방 마음에 따라 자신을 조율하면 좋지 않을까? 피아노를 조율하듯 나를 조율하면 난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취향 문제야. 피아노에 어떤 소리를 추구하는가, 그건 고객 취향에 달렸어.”
“기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일단은 의사소통이야. 되도록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그 이미지를 제대로 확인해야 해.”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피아노를 조율할 때, 피아노 주인이 원하는 감정을 조율에 실어야 한다. 조율에는 각각 감정이 이입되고 따라서 모든 피아노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피아노도 저마다 혼을 가지고 주인을 닮은 소리를 낸다. 아무리 비싼 악기라도 주인이 고약하면 녀석도 고약한 소리를 내고, 주인이 따뜻하면 녀석 역시 따뜻한 체온을 가지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짧은 이메일도 쓴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글에도 영혼이 실린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고 역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내 혼이 실린, 내 냄새가 밴, 내 숨결이 흐르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기억 속에는 수만 가지 소리가 있다. 거꾸로, 소리 속에도 수만 가지 기억이 있다. 기억은 추억이고 향수다. 기억은 모두 과거이고 미래에 대한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그 기억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잊혀진 소리, 어릴 적 뛰어 놀던 시골, 쪼그려 먹던 뽑기 같은 것, 물장구치던 개울가 같은 곳. 기억은 추억, 그리움을 재생시킨다. 솜이불이 물먹듯이 푹 빠져 든다.
“물론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 중점을 둘 것인지, 기존 소리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좋아하는 음색을 찾을 것인지요.”
“원래 갖고 있던 소리라는 게 문제야. 고객 기억 속에 있는 소리보다 기억 그 자체가 소중하지 않을까? 어린 딸이 피아노를 연주하던 행복한 기억."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 눈에 맞추는 것, 이런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선 정상에서 환호를 받는 것만 좋은 것일까?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우리 목표는 한결같이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최정상에 서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데, 목표는 한곳을 향한다. 병목 구간에서 한꺼번에 만나게 되면, 90%는 뒤엉켜 쓰러지고 다치게 된다.
숲에는 지름길이 없다.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종종 갈망한다. 기적의 귀를, 기적의 손가락을 내가 갖고 있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꽃피지 않을까. 머릿속에 그린 피아노 소리를 당장 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내가 목표로 하는 지점은 저 먼 곳에 있는 그 숲이다. 그곳까지 한달음에 갈 수만 있다면.
무리 속에 있으면 자신도 마치 무리처럼 느껴진다. 확대해 보면 무리 속에 수많은 것이 존재한다. 무리는 스스로 무리가 아니고 작은 존재가 모여 커다란 무리가 된 것이다. 누구나 무리 속 작은 존재일 뿐이며 무리 자체가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한 점일 뿐이고 따라서 공평한 존재다. 무리 속 작은 존재, 그것이 우리가 있을 자리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무리, 그것이 우리가 꿈꿀 자리다.
산이라고 생각했던 대상 안에 사실은 수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흙이 있고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르고 풀이 자라고 동물이 있고 바람이 분다.
아무도 조율사의 실력 따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피아니스트가 절찬을 받더라도 피아니스트의 공로도 아니다. 음악의 공로이다.
용기를 내야 할 것 같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공이 있다면 그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자만하지 말고, 특정인에게 가려진다고 실망하지 말자. 누구도 공은 가지고 있지 않다. 공은 이미 있었던 것뿐이다. 가치! 누구에게는 큰 가치가 누구에게는 작은 가치일 수도 있다. 큰 가치를 가진 자와 작은 가치를 가진 자가 원래 달랐던 것도 아니다.
“왜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기로 하셨나요?”
“나는 귀가 좋았어. 내 귀는 일류 피아니스트 피아노와 내 피아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내 귀 안에서 흐르는 음색과 내 귀 밖에서 흐르는, 내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음색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어. 그 차이를 도저히 메울 수 없었지.”
가치의 기준은 일반적이지 않다. 하찮은 것과 소중한 것이 시시각각 변한다. 우리는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같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도 매일 다르다. 다름이, 같지 않음이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할 때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
모든 사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가치 있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누군가도 필요할 것이다. 즉, 조연도, 조연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 보이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가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더 가치 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가치 있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보조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원래 가치 있는 사람이 더 가치 있을까, 아니면 그를 보조해 주는 사람이 더 가치 있을까? 알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가치 있는 사람일 뿐이다.
“저, 역시 피아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조율사가 되고 싶어요.”
“가즈네의 피아노를 조율하고 싶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다리, 숨결, 이해, 인연. 신화가 아니더라도 기적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욕심을 죽이고 상대방 마음에 내 맘이 닿도록 조율하고 싶다. 차분히,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마음을 조율하면 다가가지 못할 상대가 있을까? 해바라기처럼 상대방 마음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싶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다소 기분이 나쁘더라도, 상대가 높은 ‘도’를 치면 나는 겸손하게 그보다 낮은 ‘라’나, ‘시’ 정도 치면 좋겠다.
“까치들이 은하수에 다리를 만들어 준다는 설화가 있잖아요. 그렇게 피아노와 피아니스트를 이어주는 까치를 한 마리씩 여기저기에서 모아 오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말과 글로 마음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한다고 해도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정도만 표현되리라! 마음은 마음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마음이 통해야 하고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을 통해서 뿐이다. 하지만 마음은 보여 주기 어렵고 붙잡아 둘 수도 없다. 하여 시간이 흐르면, 서로 다른 곳에 있으면,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담는 그릇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찰칵’ 사진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율은 도무라에게 부탁하고 싶어.”
“피아노는 가즈네가 칠 거야.”
“하겠습니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