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 속에는 ‘시련’이라는 바이러스가 있다. 한 고비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겨우 오르막을 오르고 한숨 돌리나 싶은데 또 오르막이 보인다. 고민, 방황, 과로, 질병, 술, 담배 등 바이러스를 키우는 원인이 끝없이 계속된다. 공기처럼, 바람처럼 시련은 우리와 함께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 받고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삶은 시련 바이러스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시련 바이러스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방주사 역할도 한다. 이른바 우리 몸은 면역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을 당해 보면, 해 보면 다음번에는 처음보다 덜 아프게 되고 더 잘하게 된다. 그래서 예방주사를 맞거나 훈련을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 니체
가난, 질병, 고독, 전쟁, 기아 등 인간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는 많은 고통이 있다. 고통도 형편에 따라 다르고 태어난 국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고통은 무엇일까?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고통 받는 자들이 모여서 고통 올림픽을 한다면 누가 종합 우승을 할까?
고통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우승할까? 아니면 고통을 많이 줘 본 사람이 우승할까?
고통 올림픽은 어느 도시에서 개최를 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인도? 네팔? 타히티?
고통 올림픽에서 심판은 누가 봐야 하고 어떤 자격을 가져야 할까?
고통 올림픽 정식 종목을 채택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선 세상 모든 고통을 모으고 체계화해야 한다. 이 모든 고통을 계량화해야 한다. 누구 고통이 더 고통스러운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장비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게 내가 겪는 고통이 제일 고통스럽다.
고통 올림픽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고통 훈련을 해야 한다. 모든 고통을 견디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 고통은 그저 훈련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고통 올림픽 선수는 고통을 안 받으면 불행한 것이 된다. 고통을 받을수록 우승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시련과 고통은 사람을 자라게 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고통 올림픽 선수 자격을 갖는다. 주 종목은 다르겠지만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고통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다. 시련 없이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죽은 자에게 고통이 있을 리 없다. 결국 고통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인생이란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지 시련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시련 없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실제 3년 동안 갇혀 지냈던 저자는 정신과 의사다. 아우슈비츠는 나치 독일의 수용소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악명 높았던 수용소 중 수용소, 수용소의 갑이다. 저자는 거기서 무려 3년을 버틴 사람이다. 저자 말을 안 들을 수 없다.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 두 문장만 봐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극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같은 환경에서 누구는 살아 남았고 누구는 죽었을까? 인간이 이토록 절박한 상황을 맞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언제 수용소에서 풀려날지 알 수 없는 비참한 시간 속에서 과연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살게 했을까?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삶이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이지 시련을 부정하는 과정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만들고 살아야 하는 목표를 만드는 것이 시련을 극복하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스피노자 <윤리학>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또 아는가?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지. 과거를 꿈꾸는 경우는 없다. 모두 미래를 꿈꾼다. 과거는 추억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고 미래는 기대, 설렘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다. 미래가 담긴 선물상자를 뜯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자격이 필요한데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미래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미래가 온다.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선물이 갈 것이다.
힘들지만 출근하는 이유는 퇴근이라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춥고 매서운 겨울을 견디는 건 따뜻한 봄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은 늘 희망이라는 선물을 행복이라는 바구니에 담아서 왔다. 바구니 크기는 다를지 몰라도 어김없이 시간은 찾아 온다. 과거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미래다. 미래는 꿈이다. 우리는 오직 미래를 향한 꿈만 꿀 수 있다. 하여 우리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다. 뭐 대단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삶은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절박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단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다. 정신력 차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철학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더군다나 갇힌 공간에서, 언제 죽을지 하루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지킬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까? 무슨 수로, 나약한 인간이 저런 고통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저자는 살아 남았다. 그리고 다른 많은 동료들을 살려냈다. 수용소 안은 모든 것이 부족했을 터, 마음으로 사람을 살린 것이고 스스로 산 것이리라. 그 믿음은 무엇에서 비롯됐을까? 본인이 정신과 의사라서 일반인보다 정신적으로 강했던 것인가? 아니면 운이 좋았을 따름인가?
인간의 정신 상태와 육체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가끔 아플 때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집에 들어가면 한결 몸이 편해진다. 아마도 집에 가야 한다는 목표가 무의식 중에 있었고, 그 목표를 달성한 순간 심리적 안정감이 육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밖에서는 피곤하고 힘들었던 몸이 집에 들어가는 순간 신기하게도 평정을 찾는 상태. 몸이 느끼고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도 피곤한 줄 모른다.
의미와 목표는 미래를 위한 설계가 된다. 누구도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따라서 미래가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미래를 밝히고 명확히 준비하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아라. 그것이 바로 미래의 자신이다. 적당한 긴장감은 고통을 이겨내도록 도울 것이다. 미래에 수행해야할 과제를 설정하라. 목표는 곧 삶이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살아 있을 때는 살 걱정만 하면 된다. 죽을 걱정은 죽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두려움은 간절한 소망과 같다.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대로 일이 일어나고 만다.
paradoxical intention : 마음속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
불면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결국 어떻게든 잠을 자야겠다는 과도한 의욕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그 반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환자에게 잠을 자려고 애쓰지 말고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보라고 권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결국 삶은 스스로 행하는 모든 것이다. 삶은 능동적인 내 선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총칼도 필요하고, 철학도 필요하며 술과 담배도 필요하고 약도 필요하다. 비단결 같은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