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 2017

죽음의 수용소에서

우리 삶 속에는 ‘시련’이라는 바이러스가 있다. 한 고비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겨우 오르막을 오르고 한숨 돌리나 싶은데 또 오르막이 보인다. 고민, 방황, 과로, 질병, 술, 담배 등 바이러스를 키우는 원인이 끝없이 계속된다. 공기처럼, 바람처럼 시련은 우리와 함께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 받고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삶은 시련 바이러스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시련 바이러스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방주사 역할도 한다. 이른바 우리 몸은 면역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을 당해 보면, 해 보면 다음번에는 처음보다 덜 아프게 되고 더 잘하게 된다. 그래서 예방주사를 맞거나 훈련을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 니체

가난, 질병, 고독, 전쟁, 기아 등 인간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는 많은 고통이 있다. 고통도 형편에 따라 다르고 태어난 국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고통은 무엇일까?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고통 받는 자들이 모여서 고통 올림픽을 한다면 누가 종합 우승을 할까? 
고통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우승할까? 아니면 고통을 많이 줘 본 사람이 우승할까? 
고통 올림픽은 어느 도시에서 개최를 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인도? 네팔? 타히티? 
고통 올림픽에서 심판은 누가 봐야 하고 어떤 자격을 가져야 할까? 

고통 올림픽 정식 종목을 채택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선 세상 모든 고통을 모으고 체계화해야 한다. 이 모든 고통을 계량화해야 한다. 누구 고통이 더 고통스러운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장비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게 내가 겪는 고통이 제일 고통스럽다. 

고통 올림픽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고통 훈련을 해야 한다. 모든 고통을 견디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 고통은 그저 훈련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고통 올림픽 선수는 고통을 안 받으면 불행한 것이 된다. 고통을 받을수록 우승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시련과 고통은 사람을 자라게 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고통 올림픽 선수 자격을 갖는다. 주 종목은 다르겠지만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고통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다. 시련 없이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죽은 자에게 고통이 있을 리 없다. 결국 고통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인생이란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지 시련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시련 없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실제 3년 동안 갇혀 지냈던 저자는 정신과 의사다. 아우슈비츠는 나치 독일의 수용소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악명 높았던 수용소 중 수용소, 수용소의 갑이다. 저자는 거기서 무려 3년을 버틴 사람이다. 저자 말을 안 들을 수 없다.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 두 문장만 봐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극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같은 환경에서 누구는 살아 남았고 누구는 죽었을까? 인간이 이토록 절박한 상황을 맞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언제 수용소에서 풀려날지 알 수 없는 비참한 시간 속에서 과연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살게 했을까?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삶이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이지 시련을 부정하는 과정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만들고 살아야 하는 목표를 만드는 것이 시련을 극복하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스피노자  <윤리학>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또 아는가?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지. 과거를 꿈꾸는 경우는 없다. 모두 미래를 꿈꾼다. 과거는 추억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고 미래는 기대, 설렘이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다. 미래가 담긴 선물상자를 뜯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자격이 필요한데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미래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미래가 온다.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선물이 갈 것이다. 
힘들지만 출근하는 이유는 퇴근이라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춥고 매서운 겨울을 견디는 건 따뜻한 봄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은 늘 희망이라는 선물을 행복이라는 바구니에 담아서 왔다. 바구니 크기는 다를지 몰라도 어김없이 시간은 찾아 온다. 과거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미래다. 미래는 꿈이다. 우리는 오직 미래를 향한 꿈만 꿀 수 있다. 하여 우리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다. 뭐 대단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삶은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절박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단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다. 정신력 차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철학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더군다나 갇힌 공간에서, 언제 죽을지 하루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지킬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까? 무슨 수로, 나약한 인간이 저런 고통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저자는 살아 남았다. 그리고 다른 많은 동료들을 살려냈다. 수용소 안은 모든 것이 부족했을 터, 마음으로 사람을 살린 것이고 스스로 산 것이리라. 그 믿음은 무엇에서 비롯됐을까? 본인이 정신과 의사라서 일반인보다 정신적으로 강했던 것인가? 아니면 운이 좋았을 따름인가?

인간의 정신 상태와 육체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가끔 아플 때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집에 들어가면 한결 몸이 편해진다. 아마도 집에 가야 한다는 목표가 무의식 중에 있었고, 그 목표를 달성한 순간 심리적 안정감이 육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밖에서는 피곤하고 힘들었던 몸이 집에 들어가는 순간 신기하게도 평정을 찾는 상태. 몸이 느끼고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도 피곤한 줄 모른다. 

의미와 목표는 미래를 위한 설계가 된다. 누구도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따라서 미래가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미래를 밝히고 명확히 준비하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아라. 그것이 바로 미래의 자신이다. 적당한 긴장감은 고통을 이겨내도록 도울 것이다. 미래에 수행해야할 과제를 설정하라. 목표는 곧 삶이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살아 있을 때는 살 걱정만 하면 된다. 죽을 걱정은 죽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두려움은 간절한 소망과 같다.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대로 일이 일어나고 만다. 

paradoxical intention : 마음속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

불면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결국 어떻게든 잠을 자야겠다는 과도한 의욕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그 반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환자에게 잠을 자려고 애쓰지 말고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보라고 권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결국 삶은 스스로 행하는 모든 것이다. 삶은 능동적인 내 선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총칼도 필요하고, 철학도 필요하며 술과 담배도 필요하고 약도 필요하다. 비단결 같은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9월 08, 2017

호모 데우스

현대 사회는 대체로 호화롭고 부족함 없는 곳이다. 우리가 이런 풍족한 삶을 누리는 이유는 운 좋게 사피엔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자나 돼지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행운이 머지 않아 사라질 수도 있다. 사자, 코끼리, 원숭이, 닭, 돼지 등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사피엔스는 무엇이 다른가?

사자는 먹을 것만 좇는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먹는 것, 자는 것, 생식 활동 외에 다른 문화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볼 땐 그렇다. 지능과 인식, 상호 주관적 실재에 대한 합의, 이런 것들이 오늘날 사피엔스를 있게 만들었다. 사자가 임팔라를 죽였다는 이유로 법정에 설 일은 없다. 독버섯이 독을 가지고 있다고 식약처에 신고할 이유도 없다. 

사피엔스는 수많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 외에 사피엔스가 창조하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법, 가치, 화폐, 도덕, 종교도 모두 사피엔스가 창조한 것이다. 이 창조물은 사회적 약속이며 구성원 상당수가 인정하고 인지해야만 가치를 가지게 된다. 또는 국가, 경제, 문화, 역사, 권력의 힘으로 강제하면 한다. 아무도 화폐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무용지물이 됐을 것이다. 
사자에게 임팔라 한 마리 가질래? 백만 원 가질래? 물어 보면 답은 뻔하다. 원숭이에게 바나나 열 개 가질래? 오천 원 가질래? 물어 보면 답은 뻔하다. 만약 화폐를 선택하는 짐승을 봤다면 당신은 즉시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다. 
다른 동물들이 국가, 경제, 역사, TV, 아이폰, 전파, 화장품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고, 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 등 사피엔스가 오랜 기간 거쳐 이룬 놀라운 역사의 방관자였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방관자라는 것 자체마저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인류는, 사피엔스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전 지구적, 전 우주적 네트워크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다. 우리는 종일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안에서 논다.  네트워크를 통해 친구를 만난다. 잠시라도 네트워크를 떠나면 답답하고 불안하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안 가지고 다니던 백팩을 매일 등에 지고 다닌다. 가방 안에는 맥북이 들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지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해서다. 손에는 늘 아이폰이 잡혀 있고, 아이패드와 애플워치도 살까말까 계속 고민 중이다. 하지만 현재 네트워크와는 차원이 다른 네트워크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한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모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사피엔스에게는 마음과 의식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마음과 의식이 없으면 그게 인간이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마음과 의식은 머지 않아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거대한 알고리즘, 빅데이터, 네트워크가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통제할 것이다. 움직이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저 서 있는 건물 같은 것, 공포와 쾌감 같은 의식적인 것도 알고리즘이 통제할 것이다. 사피엔스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컴퓨터는 다르다. 또한 순식간에 그 기억을 찾아낸다. 현재 사피엔스 뇌는 절대로 빅데이터와 네트워크로 무장한, 알고리즘의 명령을 받는 컴퓨터를 이길 수 없다. 

인간은 '자연 선택'으로 진화한 아주 정교한 유기적 알고리즘이다. 현존하는 가장 정교한 컴퓨터라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몸, 우리 의식, 우리 영혼이 고도로 정교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과학 기술이 이런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이런 것을 하나씩 증명해 내고 있다. 현대 생명과학은 우리가 자유 의지대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프로그래밍 된 것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오늘 점심에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럼 이것은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즉, 뭘 먹을 것인가 결정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 배가 고픈 것은 우리 자유 의지인가 아닌가? 만약 배고픈 것이 자유 의지라면, 배고플 때 ‘배고프지 마’ 라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는 인간이 최고 가치라고 가르친다. 누구도 인간이 최고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그런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인간만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기 때문이며 인간만이 철학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있고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빅데이터를 가진 그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인류의 가치는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굳이 마음이 필요하지 않고 의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는 데 마음이 필요한가? 모든 차량이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면 굳이 의식을 가진 운전자가 필요한가? 오히려 네트워크로 연결된 차량은 절대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네트워크는 마음이 없고 의식이 없기 때문에 다른 차량을 방해하지 않고 정해진 대로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차량이 끼어든다고 해서 상향등을 켜고 빵빵거리며 위협 운전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이동수단 중에 가장 사고가 적은 것은 비행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뜨고 내리는 전 세계 모든 비행기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모든 비행기 항로가 파악되고 통제되기 때문에 사고가 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 든다. 의식이 없다는 것은 사고(事故)가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피엔스가 의식적으로 어떤 이성을 사랑한다고 치자. 며칠 지나지 않아 분명 사고가 난다. 상대방은 나로 인해 행복하기도 하겠지만 상처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고가 잦으면 결국 헤어지고 만다. 이런 일은 의식 때문에,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욕심과 가치 판단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만약 컴퓨터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면 컴퓨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여자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화를 내도, 아무리 쇼핑을 오래 해도, 화장하느라 매일 약속 시간에 늦어도 컴퓨터는 절대로 화내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은 없지만 컴퓨터는 그 여자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10년간 운동량, 혈압 추이, 몸무게 변동 추이 등. 의식이 있는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할 수는 있다고 해도 정확하게 할 수 없다. 

사피엔스와 사피엔스의 의식, 거의 모든 직업이 디지털화 될 것이다. 대규모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한치 오차 없는 전 지구적, 전 우주적 디지털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이런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최상위 명령자는 바로 다름 아닌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명령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프로그래밍 될 것이다. 사피엔스의 마음, 의식마저도. 이미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AI, 자율 주행 등. 
이런 날이 오면 사피엔스가 사자, 돼지 같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인간 동물원에 갇혀서 인공지능 컴퓨터가 던져 주는 바나나를 받아 먹을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주인 없는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주인이 오는 기척이 들리면 개처럼 문 앞에서 딸랑거릴지도 모른다. 

알고리즘은 지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편견이 없다. 오류가 없고 감정이 없다. 그리고 정확하다. 
사피엔스의 마음, 의식은 거추장스럽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전작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호모 데우스] 역시 놀라운 책이다.  


9월 02, 2017

덧없음에 대하여

살다 보면 그렇게 될 리 없는 일이, 아직 때가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어제 새벽, 자다가 깨서 시간을 보려고 스마트폰 홈 버튼을 눌렀더니 부재 중 전화 한 통이, 카톡 메시지 두 개가 와 있었다. 새벽이고 잠결이라 화장실만 갔다 온 후 자려고 했는데 부재 중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 잘 때는 스마트폰을 무음 상태로 해 두기 때문에 전화가 와도 알 수가 없다. 급한 일인지도 몰라 확인해 보니 사무실 동료가 한 전화였고 그가 보낸 카톡 메시지였다. 당황스럽게도 지인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예순도 안 됐고 평소 질병으로 고생한 적도 없는데 불과 몇 시간 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술 마시고 장난친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불안한 마음에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 7시가 되었고 그 동료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장난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대는 바람에 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급하게 샤워를 하고 검은 바지 검은 셔츠를 입고 출근했다. 사무실 옆 맥도날드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전 9시경에 공식적인 부고 문자를 받았다. 그제서야 그분이 사망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 빈소에 갔더니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 쓸쓸함을 형언하기 어려웠다. 문상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고 간밤 늦은 시간 날짜가 바뀌는 무렵에 사망했기 때문에 저녁 늦게나 다음날 손님이 많을 터였다. 
고인에게 헌화한 후 절을 하는데 아까는 보지 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영정 아래 국화꽃 옆에 놓여 있었다. 고인은 생전에 커피를 좋아하셨는데 가시는 길에 한잔 드시라고 놓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복받치는 눈물을 참고 있던 터에 커피를 보니 그게 뭐라고, 이제 마실 수 없다는 생각에 고인에게 절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상주들과 맞절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일어나 상주들을 위로하면서 계속 눈물을 쏟았다. 상주들은 예상치 못한 이른 사망 때문에 울었고, 사망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 서러워서 울었고 문상객이 우니 또 따라 울었다. 문상객은 허망해서 울었고, 죽음이 실감 나서 울었고, 상주들을 보니 안쓰러워서 또 울었다.
사람이 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도 추스리지 못한 채 떠나는 사람, 떠나 보내는 사람 가슴은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죽음, 남은 사람이 이토록 애달프고 서러운데 정작 고인은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아무것도 없이 먼 길을 가는 사람, 그 고독을 누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가시는 길에 국화꽃 한두 송이가 무슨 위로가 될 것인가? 커피 한 잔이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국화꽃은, 커피는 고인을 위로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주를 위로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문상객을 위로하는 것인가? 검은 바지, 검은 셔츠, 검은 넥타이, 검은 커피 속에 오롯이 국화꽃만 흰색이었다. 

여느 빈소 영정처럼 고인 역시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고인은 따뜻한 분이었다. 한 번도 화내는 것을 본 적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들은 적 없다. 어쩌면 그런 성정 때문에 화를 삭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쌓아 두었던 것이 심근경색이라는 저승사자를 통해 터진 모양이다. 술 한잔도 못 하시는 분이었고 오직 일뿐인 분이었다. 그러니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쌓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늘 웃는 모습이었고 고혈압 외에 병환이 깊었던 것도 아니라서 사망은 말 그대로 벼락 같은 일이었다. 

덧없다는 말은 곧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의미지만 덧없다는 말 자체가 덧없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지인이 사망했을 때…..등 무언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 때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아주 모자라거나, 갑자기 흘러 버렸을 때도 덧없다고 한다. 우리는 삶이 덧없음을 알게 될 때야 그 소중함도 알게 된다. 애석하게도 미리 알지 못한다. 이 얼마나 덧없는 짓인가? 덧없음을 미리 알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다가 덧없음이 앞에 닥쳐야 겨우 덧없다는 말을 할 뿐이다. 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덧없음을 미리 안다면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것이다. 싫은 사람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거나 싫지만 할 수 없이 만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덧없음이 덧없는 이유는 실재하는 자신이 아닌 남이 원하는 자신으로 살기 때문이다. 자기 부정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실컷 마음대로 산 후에 닥치는 덧없음과 참고 또 참다가 닥친 덧없음은 차원이 다를 터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늘 변하기 마련이다. 누구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인은 변하고 또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뜻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오늘 잘 살아도 내일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덧없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오고 만다. 우리 몸은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체부처럼 정확하게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 온다.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존중하며 살아야 할 터이다. 덧없음은 곧 안주하는 마음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시에 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실은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하여 덧없음이란 말은 참 덧없는 것이다. 
시간은 항상 존재하지만 똑같은 시간이 아니다. 오늘 12시가 내일 12시와 다르다. 오늘 만난 그 사람은 어제 만난 그 사람과 다르다. 오늘 뜬 태양이 내일 뜰 태양과 절대 같지 않다. 

고인은 내일 화장된다고 한다. 뜨거운 불 속에서 한줌 재로 변한 후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떠날 터이다. 無, 하지만 그 재가 다시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서 또 어떤 생명체로 태어날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너무 덧없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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