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을 돌이킨다 해도 딱 한 가지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없다면 후회도 없을 것이다. 후회는 과거를 향한 마음이며, 과거는 바로 시간이 만들어 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린 늘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라고 하면서 후회를 시작한다. 비로소 실존적 자아로 남게 되는 인생 황혼기에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 보면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지난 삶에 대한 후회가 밀물처럼 닥칠 것이다. 어떤 인생을 살았든 태산 같은 후회가 반드시 밀려올 것이다. 전문가적 자아는 사라지고 실존적 자아만 남았기 때문이다. 인생 전체를 통째로 바친 전문가적 자아는 때가 되면 반드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시간을 되돌려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든 굴러가고, 시간은 무시로 흘러가며 곧 인생은 저절로 지나간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무엇을 하든 시곗바늘은 끊임없이 우회전한다. 마침내 누구나 마지막 저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겐 다양한 면이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품위가 가득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정반대일 수 있다. 품위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본인 직업에서 상당한 품위를 인정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 모든 것이 품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연인, 직업인, 아빠, 남편 등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인격이 존재한다. 한 사람당 인격이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여러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가족을 대할 때, 친구를 대할 때, 거래처 사람을 대할 때 각각 다른 사람이 된다.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고 그에 따른 개별 품위가 있다. 어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품위를 훼손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일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이며 동시에 품위 없는 사람이다.
자연인으로서 실존적 품위를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그 사람이 하는 일, 사회적 위치 등 전문가적 실존으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조용필은 가수로서, 노무현은 정치인으로서, 미스코리아는 미모로서 그 실존을 평가받는다. 하여 전문가적 실존이 사라지는 인생 황혼기나 내리막길에 접어 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연인으로서 실존을 찾지 못해 우울하게 된다. 실존적 자아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어렵고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가치를 인정받고 자기 분야에서 품위 있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 인생 황혼기에서 돌이켜 볼 때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었던 신념, 확신에 찼던 가치 판단은 여전히 유효한가?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후회를 하게 된다. 결국 실존적 자아만 남는데 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알맹이인 동시에 껍데기일 뿐이다. 실존적 자아가 본질임에도 평생 껍데기로 치부하다가 전문가적 자아를 상실한 후에 다시 알맹이로 대접하려고 하니 어찌 진정한 본질이 되겠는가 말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실존적 존재로 돌아갈 터이다. 사적 실존을 버리고 전문가적 실존을 지키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실존적 자아가 더 중요한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실존적 자아를 지키는 것은 어쩌면 배부른 소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실존적 자아와 전문가적 자아 사이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을수록 점점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좋은 책이다.